"대주단 협약에 가입할 경우 시공권을 박탈한다는 조항을 공사 계약서에 명기하겠다고 해외 발주처가 엄포를 놓고 있습니다. "

해외 플랜트 수주를 담당하는 A건설사의 K모 전무는 "중동에서 석유화학 플랜트 수주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대주단에 가입하라면 수주를 포기하라는 얘기"라며 흥분했다. 대주단 협약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debt-rescheduling program(채무조정프로그램)'에는 부도가 날 게 뻔한 기업을 살려준다는 다소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어서다.

B건설사 사장도 "외국 경쟁사들이 한국 업체의 과거 경영난(예를 들어 워크아웃)을 다룬 기사 10년치를 스크랩해서 발주처에 제공하는 식으로 수주경쟁이 붙는다"며 엄살이 아님을 강조했다. 심지어 해외 발주처가 이런 상황을 역이용하기도 한다. C건설업체 관계자는 "발주처가 한국 업체의 신용도를 문제 삼으며 공사비의 15~20%에 달하는 선수금을 깎으려 들거나 지급을 미루려고 한다"고 전했다.

해외건설협회 관계자는 "앞뒤 재지 않고 대주단 가입만 독촉하는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며 "기업의 국제적 신용을 흠집 내지 않으면서 구조조정을 추진할 합리적 정책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국내외에서 사면초가의 위기에 몰린 건설업계는 부동산 거품을 부풀린 건설업계의 책임을 부인하진 않지만 정부와 금융권도 건설업계의 고충을 진지하게 들어 달라고 하소연하고 있다.

금융권의 경쟁적인 대출금 회수도 피를 말린다. 자금난을 겪는 중견 D건설사의 임원은 "대통령은 금융권에 기업 자금지원을 독려하고 있지만 일선 창구는 딴판"이라며 "한 증권사가 '내년 4월까지 약정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을 이유 불문하고 상환하라'며 목을 조른다"고 털어놓았다.

E건설사 관계자는 "빌려 쓰라고 사정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선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을 조기 상환하라고 득달같이 요구한다"며 "약정 기간이 남은 채권의 빚까지 수일 내로 갚으라고 압박한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운전자금용 현금이 4000억원이 있지만 이런 식이면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알 수 없다"며 "건설사들이 무너지고 나면 은행의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PF 형태의 신규 대형개발사업도 '올스톱'되고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서울 상암동 랜드마크타워의 본계약 연기 예를 들며 "사업타당성을 보고 투자해 이익을 회수하는 건데도 금융기관들이 몸을 사리느라 대형 개발사업이 멈춰섰다"고 전했다.

국토연구원 손경환 건설경제연구실장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한국은행 국토해양부 등으로 분산된 정책을 종합적으로 수립,시행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