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NOW] '김일성 父' 김형직 사망 97주기…백두혈통 띄우기
북한이 5일 '수령의 아버지' 김형직 사망 97주기를 맞아 '백두혈통' 띄우기에 나섰다.

대남 라디오 방송인 '통일의 메아리'는 이날 김형직 생애가 '나라의 독립과 후손만대의 번영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열렬한 애국자의 빛나는 생애이자 강의한 혁명가의 고결한 한생이었다'고 칭송했다.

매체는 북한 주민들이 "(김형직의) 숭고한 뜻을 심장 깊이 간직하고 경애하는 김정은 원수님의 사상과 영도를 충직하게 받들어 이 땅 위에 부강·번영하는 사회주의 강국을 반드시 일떠세우고야 말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에서 김형직은 아내인 강반석과 함께 '반일 민족해방운동의 탁월한 지도자인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로 추앙받고 있다.

북한은 1975년 평양사범대학을 김형직사범대학으로, 1988년 함경북도 후창군을 김형직군으로 개칭했다.

김형직은 1894년 7월 10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08년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강반석과 결혼했다.

그는 1911년 미국선교회가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인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다가 1912년 아들 김일성(당시 김성주)이 태어나고, 그 이듬해 학교를 중퇴하고 만경대 순화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김형직은 기독교 계열 명신학교로 옮겨 교편생활을 하다 1917년 3월 평양 숭실학교 출신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에 조선국민회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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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같은 해 가을 일제 경찰에 체포돼 평양감옥에 투옥됐다가 이듬해 가을 출옥한 뒤 만주의 린장(臨江)으로 이주했다.

김형직은 1919년 가을 순천의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한약사로 일했다.

의원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 의대) 졸업증서가 걸렸지만,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김형직이 "아마 평양을 떠나기 전에 어느 친구에게 부탁하여 얻어온 졸업증이었다고 생각된다"며 가짜 증서임을 시인했다.

김형직은 1921년 여름 바다오거우(八道溝)으로 이주해 광제의원을 차렸다.

김일성은 11살 때인 1923년 4월 외가인 평양 만경대 칠골에 있는 창덕학교에 입학했다.

북한은 김형직이 "혁명을 하자면 조국의 현실을 알아야 한다"며 1923년 3월 김일성을 바다오거우에서 압록강을 건너 칠골까지 17일간 걸어가도록 했다며 이 여정을 '배움의 천리길'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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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직은 1924년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가 탈출한 뒤 그 이듬해 활동지를 지린성 푸쑹(撫松)으로 옮기고 무림의원을 개원했다.

김일성도 1925년 평양 창덕학교에서 중국 풍쑹제1소학교로 전학했다.

북한은 김일성이 당시 "조선이 독립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며 만경대를 출발해 바다오거우까지 걸어갔다며 '광복의 천리길'이라고 선전한다.

김형직은 이듬해인 1926년 6월 5일 32세 나이로 사망했다.

북한은 평양시 강동군 봉화리와 평안북도 삭주군 남사로동자구, 자강도 중강군 중강읍 등에 김형직의 동상을 설치했다.

만경대 묘지에는 그와 아내 강반석의 반신상이 있다.

김형직이 일제강점기 항일 투쟁을 하기는 했지만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탁월한 지도자'라는 북한의 주장은 백두혈통 우상화를 위해 과장된 측면이 많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실장은 "조만식 선생 등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양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많이 띄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형직도 그런 흐름을 따라간 인사 중 한 명일 뿐 비중 있는 인물은 아니었지만, 북한은 김일성 가계와 혈통을 절대화하기 위한 우상숭배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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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