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사르습지 등재 후 보호는커녕 생존 위험에 무방비 노출
겨울 먹이용 포기 벼 보존과 잠자리 조성 2년 연속 무산 때문

경기 고양시 장항습지의 깃대종인 재두루미가 지난해 람사르습지 등재 이후 보호는커녕 되레 생존을 위협받는 처지가 됐다.

신체 특성상 먹이경쟁에서 매우 불리한 재두루미를 별도로 관리하기 위한 계획이 고위험성 인플루엔자(AI) 확산과 지뢰 사고 이후 사실상 중단됐기 때문이다.

장항습지는 상류에 폭우가 내리면 강원도 일대에 매설된 지뢰가 쉽게 유입돼 특별대책이 없는 한 이곳에서 월동하는 재두루미는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장항습지 깃대종' 재두루미 고위험성 AI와 지뢰에 퇴출 위기
◇ 람사르습지 등재 후 재두루미 서식 환경 되레 악화
8일 고양시에 따르면 한강하구를 따라 약 7.6㎞ 구간에 형성된 장항습지는 대륙 간 이동 물새의 서식지이자 중간 기착지로서 보존 가치가 높아 지난해 5월 21일 람사르습지로 등재됐다.

재두루미와 저어새, 흰꼬리수리 등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물새 3만여 마리가 해마다 겨울을 나고 조수간만으로 형성된 갯골과 버드나무 숲이 어우러진 장항습지의 중요성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결과다.

시는 람사르습지 반열에 오른 장항습지를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생태관광 거점으로 활용하려 했으나 실상은 정반대가 됐다.

람사르습지 인증 후 보름도 안 돼 환경정화를 하던 70대 남성이 지뢰 폭발로 오른쪽 발목이 잘리면서 습지 관리 사업이 전면 중단됐다.

그 결과 다른 조류보다 먹이다툼 능력이 뒤지는 재두루미가 생존 위협을 받게 됐다.

'장항습지 깃대종' 재두루미 고위험성 AI와 지뢰에 퇴출 위기
◇ 4개월간 볍씨 뿌려도 재두루미는 '왕따'
재두루미는 통상 10월 이후 장항습지를 찾아와 무논에 떨어진 벼 낱알 등으로 끼니를 해결하다 곡식이 떨어지면 강이나 버드나무숲 부근으로 옮겨 다른 먹이를 찾는다.

하지만 무논을 벗어나면 삵이나 유기견 등의 공격 징후를 쉽게 알아채기 어려워 늘 긴장해야 한다.

재두루미는 부리와 목이 길어서 먹이경쟁에서도 매우 불리하다.

목과 부리가 짧은 황여새나 개평, 참새 등이 땅에 널린 알곡 등을 마음껏 쪼아먹을 때 재두루미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시는 이솝우화 '여우와 두루미'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상식이 된 이런 사실조차 무시한 채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조류 먹이용 벼 36t을 장항습지에 격일 간격으로 62차례 뿌렸다.

하지만 재두루미는 풍부한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쫄쫄 굶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실은 고양시정연구원의 최근 조사에서 확인됐다.

재두루미 분변에서 볍씨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장항습지 깃대종' 재두루미 고위험성 AI와 지뢰에 퇴출 위기
◇ 고병원성 AI 확산에 무논 조성마저 무산
환경부는 재두루미를 비롯한 철새의 생태 특성을 고려해 장항습지를 관리하도록 특별 지침을 지난해 마련했으나 이행되지 못했다.

지침에 따르면 장항습지와 인근 산남습지 논에서 경작된 벼를 그대로 두고 가을걷이를 한 데는 짚을 잘게 썰어 뿌린 다음 물을 수시로 대줘야 한다.

시는 이들 습지에서 논농사를 짓는 주민들에게 해당 지침을 제시하며 합당한 보상을 조건으로 재두루미 관리 계약을 하려 했으나 무위로 그쳤다.

가을에 벼를 베지 않으면 봄에 논갈이가 어려워 이듬해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이유 등으로 농민들이 계약을 거부했다.

다만, 재두루미 잠자리 조성을 위해 수확한 논에 물을 대주는 계약은 했으나 고병원성 AI가 확산하면서 관리인의 습지 접근이 금지돼 무논 조성마저 무산됐다.

올해는 포기 벼 보존과 무논 조성뿐만 아니라 볍씨 뿌리기마저 중단됐다.

그 결과 재두루미는 이전보다 도래 시기가 늦어지고 개체 수도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장항습지 깃대종' 재두루미 고위험성 AI와 지뢰에 퇴출 위기
◇ 장항습지 보존 어려워 간접 체험만 허용
재두루미는 무논과 같은 별도 공간을 마련하고 굵은 자갈이나 식생 매트 사이에 볍씨를 뿌려줘야 잠자리와 먹이를 해결하는데 이런 작업은 현재 불가능하다.

강원도 비무장지대(DMZ) 등에 매설된 M14 대인지뢰가 폭우 때마다 급류에 휩쓸려 하류인 장항습지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신관을 뺀 나머지가 플라스틱인 M14 지뢰는 금속탐지기로 찾기 어려운 데다 작고 가벼워서 돌 틈이나 나무에 끼었다가 물이 빠지면 그대로 남게 돼 사람 접근이 위험해진다.

따라서 시는 시민 안전을 고려해 민간인의 장항습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다만, 습지 생태계 보호와 더불어 람사르협약의 핵심 가치인 합리적 이용을 위해 내년 5월 개관하는 습지센터는 애초 계획대로 운영할 방침이다.

장항습지 부근에 지상 2층, 연면적 999㎡ 규모로 건립되는 이 센터에는 미디어아트관과 4D 영상관, 생태 교육장 등이 들어서 계절별 습지 변화를 간접 체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센터에는 장항습지와 한강하구의 탁 트인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약 30m 높이의 전망대도 세워진다.

'장항습지 깃대종' 재두루미 고위험성 AI와 지뢰에 퇴출 위기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