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타격 컸던 의류기업 생산량 회복세…'LHK 크리에이션'로 사명 바꿔
민다나오 오지에 학교 67곳 지어줘…공장문 닫아도 계속 찾아가 보살펴
40년 넘게 필리핀서 사업…한국전 참전용사와 후손들 지원에도 앞장
'필리핀 한인사회 대부' 이원주 회장 "화산·코로나 악재 떨쳐"
"화산폭발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두 악재를 떨쳐내느라 죽을힘을 썼습니다.

"
'필리핀 한인사회 대부'로 불리는 이원주 LHK 크리에이션 회장은 27일 콘래드 마닐라 호텔에서 만난 기자에게 지난 2년 넘게 겪었던 일들을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이 회장은 35년 전 창업한 의류회사 '케이 리 패션'(KAY LEE FASHION)의 사명(社名)을 역경을 딛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난해 두 아들의 이름 호섭(H)·규섭(K)을 따서 'LHK'로 변경했다.

그는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필리핀 마닐라 지회 원로다.

지회장을 맡아 활성화와 발전을 이끌었다.

전날 같은 호텔에서 열린 '마닐라지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자랑스러운 필리핀 옥타인 상'을 수상했다.

'필리핀 한인사회 대부' 이원주 회장 "화산·코로나 악재 떨쳐"
이 회장은 코로나19가 터지기 전 먼저 화산 폭발 피해를 봤다.

수도 마닐라에서 남쪽으로 65㎞가량 떨어진 섬에서 2020년 1월 12일 탈 화산이 폭발하면서 화산재가 그의 공장을 뒤덮었기 때문이다.

당시 탈 화산 7km 반경 안 공장 3곳에서 2천500여 명의 현지인을 채용해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 제이크루(J. CREW), 앤테일러(ANN TAYLOR) 등 미국의 유명한 여성 의류 브랜드를 주문자 상표부착 방식(OEM)으로 제조·생산했다.

그런데 화산 폭발로 주변에 거주하던 직원들이 직격탄을 맞았고,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직원과 가족들이 임시 대피소로 옮겨 살면서 일할 사람이 없자 공장 문도 닫았다.

대신 그는 물과 식품을 사고, 마스크를 직접 제작해 나눠주는 등 직원들 피해 지원에 나섰다.

화산폭발은 천재지변이라 바이어들도 이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는 등 어느 정도 수습을 해 나갈 즈음 코로나19가 터졌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어요.

코로나는 화산폭발보다 더 큰 충격을 줬죠. 필리핀 상공부에 찾아가 수출회사는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고, 회사 직원들이 상공부로부터 통행권을 받았죠. 하지만 어떤 검문소는 허용하고, 어떤 검문소는 통제해 이를 해결하러 다니라 더 고생했습니다.

"
직원들이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백신 주사를 맞히고, 진단 키트를 사서 계속 검사를 했다.

감염되거나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 싶으면 격리소로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고객사들은 주문을 끊었고, 200년 전통의 남성복 '브룩스브라더스'에는 10만 달러가량 떼이기도 했다.

다시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문 닫고 매일 8시간씩 5만 보 이상을 걸었어요.

제정신이 아니었죠. 두 달을 계속 걸으니까 체중이 확 빠지더군요.

발가락이 터져서 피가 나고, 발톱도 빠지고. 운동화 두 켤레가 걸레가 됐습니다.

"
이 회장은 공장 문을 닫아 일은 못 하는 대신 정신력이라도 잃지 말자고 걷기를 시작했다.

지구력이 어디까지인지 도전하고 테스트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공장을 재가동했고, 현재 정상궤도에 60%가량 근접했다.

직원이 줄어들었지만, 1천800여 명의 직원이 힘을 모아 연간 매출액 5천만 달러(약 632억원)에 도전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엔데믹으로 가고 있어 올해는 70%까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자신한다.

이 회장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2년간 지속해서 남동부에 있는 섬 민다나오를 찾았다.

이곳 오지에는 그가 2003년부터 30년간 지어준 학교 67곳이 있다.

초등학교 62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 장애인학교 3개교(기숙사 포함)다.

학교 시설이 파손되면 이를 보수하거나,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을 중단없이 하기 위해서다.

오는 9월 학교 세워주기 사업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뒤에서 묵묵히 도와준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감사 행사를 열 계획이다.

민다나오에 학교를 짓기 전에는 빈민 구제에 나섰고, 대학생·고교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했다.

'필리핀 한인사회 대부' 이원주 회장 "화산·코로나 악재 떨쳐"
이 회장은 6·25 한국전쟁에 참전한 필리핀 용사들과 그 후손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매진하고 있다.

'필리핀에서 번 돈은 필리핀에 환원하겠다'는 신념을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한인사회에도 열심히 봉사한다.

필리핀 한인사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필리핀한인연합회장을 맡아 중심을 잡았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11∼15기), 필리핀 한국국제학교 이사와 학교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필리핀에서 인생의 절반이 넘는 40년을 살았다.

경남 고성 출신인 그는 1976년 제대하고 부산의 국제그룹 산하 조광무역에 입사하면서 의류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4년 뒤 필리핀 파견 근무를 자처해 날아왔다가 1년 만에 철수 명령을 받아 귀국했다.

짧은 필리핀 파견 기간에 그는 '이 나라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을 키웠고, 1983년 미국 의류회사가 필리핀 공장에서 일할 한국인 매니저를 찾는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주저 없이 달려갔다.

그렇게 다시 밟은 필리핀 땅에서 그는 3년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고 1987년 여성복 전문 의류회사인 '케이 리 패션'을 창업했다.

"노조원들의 불법파업으로 회사가 문을 닫고, 소송에 휘말리는 시련으로 몇 차례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는 등 기업 경영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어요.

그래도 코로나19보다는 그때는 덜 고생했던 것 같긴 합니다.

"
한국 정부는 2011년 그에게 국민포장을 서훈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