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0일 취임사를 통해 한국 정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해악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했다. 대선 당시엔 거론하지 않았던 데다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철학적 표현이어서 정치권의 주목을 끌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정치는 이른바 민주주의의 위기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반지성주의”라고 말했다. 반지성주의의 실례로는 다수가 숫자로 소수를 억압하는 행위 등을 들었다. 그는 “국가 간, 국가 내부의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며 “이런 상황이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윤 대통령은 직접 취임 연설문 초안을 쓰고 여러 차례 고치며 고심 끝에 ‘반지성주의’라는 단어를 고른 것으로 알려졌다. 철학, 과학 등 지식을 배척하는 의미로 사용되는 반지성주의는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퓰리처상 수상작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계기로 널리 퍼진 용어다. 냉전시대 매카시즘 광풍을 불러온 미국 상황에 빗대 한국의 정치 현실을 설명하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왔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거대 야당인 민주당의 독주를 경계하고 여야가 협치와 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의지를 강조했다는 해석도 나왔다. 민주당이 국민의힘의 반대 속에 ‘위장 탈당’ 등의 꼼수를 통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관련법을 강행 처리한 것을 겨냥했다는 의미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통홰 민주당의 내로남불식 행태를 비판한 것” 이라고 꼬집었다.

윤 대통령 측은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전 세계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성찰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영국의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언급한 ‘다수의 횡포’와 프랑스의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꼬집었던 ‘대중 여론의 독재’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는 설명이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인문학적 교양이 취임사 곳곳에 담겼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가치로 ‘자유’를 제시했다. 그는 “이 어려움을 해결해나가기 위해서 우리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그것은 바로 자유”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자유의 가치를 제대로,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자유의 가치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자유’에는 본인의 철학적 사고가 녹아 있다.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자유는 결코 승자 독식이 아니다”며 “자유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경제적 기초 그리고 공정한 교육과 문화의 접근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자유를 중시하면서도 저소득 계층에 대해선 ‘부의 소득세’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미국 시카고학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사상과 궤를 같이한다.

이유정 기자 yj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