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대북 쌀 수출 관련 한미 외교당국 협의 내용 공개
[외교문서] 美농업계, 남북 쌀 교역에 "수출시장 교란" 발목
정부가 1991년 남북관계 개선 방안으로 추진했던 남북 간 쌀 직교역이 미국 농업계의 반대와 통상 마찰 우려로 난항을 겪은 상황이 15일 공개됐다.

쌀 직교역에 대한 미국 농업계의 부정적인 입장은 당시에도 알려지긴 했지만, 이를 둘러싼 한미 외교 당국 간 상세한 협의 내용은 그간 비밀에 부쳐졌다.

외교부가 이날 공개한 비밀해제 외교문서에는 1991년 한국의 천지무역상사가 북한의 금강산국제무역개발회사와 추진한 쌀 거래가 주요 한미관계 현안으로 등장한다.

천지무역상사는 1991년 3월 금강산국제무역개발회사와 쌀 10만t을 북한산 무연탄 3만t 및 시멘트 1만1천t과 교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이상옥 외무부 장관은 4월 5일 주미대사에게 거래 사실을 미국 측에 설명하라면서 "국가 간의 교역이 아닌 남북한 간의 물물교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미국의 대외 쌀 수출시장을 교란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 바람"이라고 지시했다.

주미대사관은 국무부 한국과 담당관에 설명한 결과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는 반응을 보고했지만, 4월 17일 면담에서 국무부의 태도가 달라졌다.

국무부 측은 쌀 교역 총 규모가 10만t이라는 언론 보도에 관해 물으면서 "미국 양곡 도정업자 협회 등에서 남북한 간 직교역이 국제 쌀 거래 질서에 바람직하지 않은 선례를 남기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금번 거래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정부는 거래가 남북관계에서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상업적 시각에서만 계속 문제시하는 경우 한국 국내 여론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지만, 미국 농무부가 계속 이의를 제기했다.

[외교문서] 美농업계, 남북 쌀 교역에 "수출시장 교란" 발목
농무부 무역과장은 4월 18일 주미대사관 측과 면담에서 한국이 1990년 말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에서 보여준 입장에 불만을 표시하며 "대북한 쌀수출도 미국의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5월에 대책회의를 개최했고 "만일 미측이 남북한 쌀 10만t 반출에 제동을 걸 경우 이는 한국민의 반미감정을 유발할 우려를 지적하고 이해 획득을 노력"한다는 대응 방안을 정했다.

"미측의 쌀 문제에 대한 관심에 비추어 대미 협의 과정도 누설되지 않도록 유의"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7월 2일 국무부에서 열린 한미 외무장관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주요 안건으로 논의됐다.

로버트 젤릭 국무부 경제차관은 쌀 거래 규모가 더 커지거나 한국이 국내 쌀 시장을 개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북한이 한국산 쌀을 재수출할 경우 "미국 내 쌀 생산업계 등 이해관계 단체를 납득시키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쌀 생산업계가 법적 조치를 취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한국이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의 의무면제(waiver) 규정을 통해 남북 쌀 거래를 국내거래로 인정받을 것을 제안했다.

결국 미국은 7월 18일 "기본적으로 미국으로서도 남북한 간 쌀 거래에 반대하지는 않으나 유사한 거래가 GATT나 FAO 등의 테두리 내에서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본다"는 요지의 입장을 통보했다.

그러나 정부는 GATT로부터 면제를 확보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방식에 부정적이었다.

결국 천지무역상사의 쌀 5천t을 실은 배가 7월 말 북한에 도착했지만, 이후 남북관계가 부침을 겪고 미국을 비롯한 쌀 수출국들과 통상 마찰 우려로 남북 쌀 교역은 본격적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외교문서] 美농업계, 남북 쌀 교역에 "수출시장 교란" 발목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