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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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사상 초유의 돈풀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100조원 소상공인 손실보상’ 카드를 꺼내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이를 바로 받아들였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100조원 지원 방안 마련을 위한 여야 회동을 제안했다. 국가채무가 급증하는 가운데 여야가 ‘쩐(錢)의 전쟁’까지 벌이면서 정부 재정이 위협받고 있다.

이 후보는 8일 기자들과 만나 김 위원장이 코로나19 소상공인 대상 ‘100조원 지원’을 제안한 것에 대해 “진심이라면 환영”이라고 밝혔다. 전날 김 위원장이 “각 부처 예산을 구조조정하고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100조원 정도를 마련해 (자영업자) 피해 보상에 투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이 후보도 동의한 것이다.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김 위원장의 100조원 지원책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송 대표는 한술 더 떠 “(100조원 손실보상) 방안을 찾기 위해 저와 윤호중 원내대표, 김 위원장과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 간 4자 회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송 대표는 100조원 지원을 위한 내년 초 추가경정예산 편성에 대해 “얼마든지 방안을 찾을 수 있다”고도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지원 폭탄’ 주장이 구체적인 산정 근거도 없는 데다 재원 조달 방안에 관한 고민도 없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가 코로나19 사태 이후 여섯 차례의 추경을 통해 지급한 소상공인 지원 예산이 총 22조원 규모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100조원 지원책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야의 선심성 경쟁에 국가재정은 점점 악화하고 있다. 내년 국가채무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50% 수준인 1064조4000억원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가파르게 국가채무 비율이 오르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이 미래 청년세대에 큰 부담을 지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종인이 확 키운 ‘대선 판돈’
유례없는 ‘연초 추경’ 이뤄지나

25兆 50兆 100兆 포커판 닮아가는 돈풀기
연초 추가경정예산 편성은 전례가 드물어 편성 권한을 쥐고 있는 정부가 동의할 가능성이 낮다. 현재 세계잉여금은 3조원가량에 불과하고 국가 결산을 확정하는 내년 4월에야 사용할 수 있어 추경을 편성하려면 대규모 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중도층 포섭을 위해 지르고 보는 게 낫다는 전략”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여야가 주장하는 지원 규모는 점차 늘어나는 양상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는 지난 10월 말 25조원 규모의 전 국민 재난지원금을 내년도 예산안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자영업자 손실보상 50조원 공약으로 맞대응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은 “50조원으로 부족하다”며 포커판에 판돈 불리듯 ‘100조원 카드’를 내밀었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주장을 철회한 이 후보는 국민의힘의 대규모 손실보상 방안이 나올 때마다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지원 시점을 대선 전으로 앞당기자고 역 제안까지 했다. 조승래 민주당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100조원 제안을 환영한다. 지금 당장 논의에 나서야 한다”며 “100조원 투입을 위해서는 우선 윤 후보도 이 제안에 동의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100조원 카드를 던진 국민의힘 내부에서도 액수를 두고 혼선을 빚고 있다.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100조원 지원’과 관련해 “자영업자 피해 보상과 관련한 윤 후보의 공약은 50조원 투입”이라며 “이 공약이 달라진 건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위원장 말씀
은 추가 지원 방안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선대위 내부에서 손실보상 규모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채 일단 ‘지르고 보자’는 전략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도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재난지원금 지급을 전면 반대했다가 황교안 대표가 뒤늦게 50만원 지급을 주장하는 등 혼란을 자초했다. 당시 김 위원장의 100조원 지원 주장까지 얽히며 내부 입장을 정리하지 못했고, 여당의 공세에 결국 참패하고 말았다.

‘현금 살포’ 경쟁을 둘러싼 여당 내부의 우려도 감지된다. 민주당으로선 지난 3일 내년도 예산안을 처리한 지 1주일도 안된 시점에 추경 이슈가 나오는 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재정 지출에 소극적인 기획재정부의 반대를 극복할 수 있을지 미지수인 데다 대선을 앞두고 당정 갈등
이 재연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는 아직 내년 예산 집행을 시작하지 않은 상황인 만큼 추경 논의에 대응하지 않고 있다.

다만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경우 이례적으로 대규모지원책이 마련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660조원 규모였던 국가채무는 올해 965조원까지 늘었다. 내년엔 1064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
수는 “지금 유권자는 국가채무 비율이 크게 높아져도 별 영향이 없지만, 현재 20대가 안 되는 세대가 경제활동을 활발하게 할 때는 국가채무가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 고 했다.

고은이/정의진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