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불가침·교류협력 기본개념 만들어…현재 모든 남북합의에 큰 영향
[장용훈의 한반도톡] 기본합의서 30년…여전히 남북관계의 근간이다

오는 13일로 남북기본합의서가 체결된 지 꼭 30년이 된다.

기본합의서는 1991년 12월 13일 오전 9시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당시 남측의 수석대표였던 정원식 국무총리와 북측의 대표단장이었던 연형묵 정무원 총리가 서명했다.

통상 남북기본합의서라고 불리는 이 합의의 공식 명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로 4개 장, 25개 조항으로 구성됐다.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기본합의서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남북간 화해·불가침·교류협력 이행을 위한 부속합의서를 덧붙여서 구체성을 더했다.

이런 기본합의서의 근간에는 국제냉전질서의 해체 속에서 '적'이었던 북한은 평화와 통일의 '동반자'로 포용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이 있었다.

특히 평화공존을 통해 단계적으로 민족공동체를 구성해 가자는 노태우 정부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철학이 기본합의서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러나 사실 기본합의서에 담긴 이런 정신은 노태우 정부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앞서 군부 권위주의 체제의 문을 연 전두환 전 대통령도 민족문제에서는 전향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아웅산 묘소 테러사건이 발생하고 2년 뒤인 1985년 당시 북한의 허담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가 남쪽을, 장세동 안전기획부장이 비밀리에 방문해 남북 정상의 친서를 주고받았다.

전 전 대통령은 친서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면서 평화를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과 흐름이 냉전구조의 해체라는 국제질서의 변동을 맞이하면서 기본합의서로 이어진 셈이다.

다만, 북쪽은 이 합의를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에서 승인하고 당시 김일성 주석의 최종비준까지 받았지만, 남쪽에서는 대통령의 재가에 그친 채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장용훈의 한반도톡] 기본합의서 30년…여전히 남북관계의 근간이다

그런데도 기본합의서는 여전히 지금까지 남북관계의 구석구석을 규정하며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규정하는 표현으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설명은 기본합의서의 서문에 담긴 내용이다.

2000년 반세기만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남북관계를 풀기 위한 다양한 합의가 이어져 왔는데 대부분의 그 원칙과 정신은 이미 기본합의서에 명시돼 있던 부분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이어오면서 '퍼주기' 논란의 중심에 섰던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해 기본합의서 부속합의는 "남과 북은 인도주의 정신과 동포애에 입각하여 상대측 지역에 자연재해 등 재난이 발생할 경우 서로 도우며…"라고 명시했다.

또 남북경제협력사업에 대해서는 "남과 북은 물자교류와 석탄, 광물, 수산자원 등 자원의 공동개발과 공업, 농업, 건설, 금융, 관광 등 각 분야에서의 경제협력사업을 실시한다"고 합의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서 공방의 대상이 되는 문재인 정부의 '9·19군사합의'도 불가침에 관한 부속 합의를 구체화한 것이다.

이 합의에는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무력 증강하지 않는 문제, 상대방에 대한 정찰 활동을 하지 않는 문제' 등을 명시했다.

특히 차관급을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통해 이러한 활동을 논의하고 수행하도록 했는데 이 역시 9·19군사합의에 담겼다.

남북관계의 거의 모든 부문을 규정하면서 이름 그대로 '기본합의'로서 현재까지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30년 전 남북한이 서명한 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를 곱씹어 본다면 엄혹한 국내외 환경을 극복할 길을 찾을 수도 있다.

기본합의서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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