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예술공연단 교환방문 '훈풍'…KAL기 폭파로 긴장 고조
[전두환 사망] 아웅산테러부터 北대남지원까지…역동의 남북관계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임 기간 남북관계는 극도의 긴장과 훈풍이 교차하는 역동의 시기였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 폭탄테러를 가하며 남북 간 긴장을 고조시켰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전 전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아웅산 테러' 사건이다.

1983년 10월 미얀마를 방문한 전 전 대통령이 아웅산 국립묘소를 참배할 때 묘역에 폭탄을 설치하고 테러를 감행해 당시 서석준 부총리와 장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했다.

당시 이 사건은 북한군 정찰총국 소속 군인들의 소행으로 밝혀졌는데 이를 계기로 정부가 북한과의 모든 대화를 단절하면서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후 남북관계는 북한의 대남 인도적 지원을 계기로 한때 화해 모드로 전환됐다.

1984년 9월 남측 중부지방에 대홍수가 발생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조선적십자회 이름으로 통지문을 보내 쌀 5만석(7천200t), 천 50만m, 시멘트 10만t, 의약품 지원을 제안했고, 당시 전 전 대통령은 아웅산묘소 폭파 암살 시도에도 북쪽의 제안을 전격 수용했다.

북측은 제안하면서도 남측에서 수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생색내기'로, 남측은 북측의 생색내기에 대한 '골탕 먹이기' 차원에서 수용한 측면도 강했는데, 실제 이 지원으로 북한 경제가 악화한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어쨌든 당시 북측의 식량지원 이후 남북 양측은 적십자회담 본회담을 가진 데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을 실현했고 남북간 최초의 경제회담도 시작했다.

하지만 1987년 11월 KAL기 폭파사건으로 남북 간 긴장이 다시 고조되기도 했다.

당시 남한에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열흘 남짓 앞두고 북한 공작원 김현희 등에 의해 사건이 발생,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와 승무원 등 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국가 원수로는 일본을 처음 방문해 일왕으로부터 양국의 역사적 불행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받아냈고, 미국, 일본에 편중된 외교무대를 대서양권으로 확대했다는 평가도 있다.

재임 기간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했는데 통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선언의 의미가 강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민간분야 통일운동을 탄압했다는 평가도 있다.

전 전 대통령은 1983년 11월 한국을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핵 개발 포기를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박정희 정권 말기 악화했던 대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거래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지난 2017년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전 전 대통령은 1986년 10월 방한한 에드워드 라우니 미 대통령특사와의 접견에서 "우리 한국에도 핵무기 3개만 있으면 북한이 남북대화에 응해올 것"이라고 밝혀 핵 개발 중단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82년에는 국산 헬기에 이어 국산 전투기(제공호 1호기·KF-5F)를 면허 생산함으로써 아시아에서 3번째 항공기 생산국이 됐고 같은 해 11월에는 한국형 경비함을 건조했다.

최신예 전투기 F-16을 도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