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초당 지지… 기본합의서 맺고 밀사 오가며 정상회담 추진
정주영 '금강산 합의'도 막후 지원…"우리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노력"

"우리는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밝은 시대를 함께 열어가야 합니다…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로서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야말로 번영된 통일조국을 실현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다.

"
[장용훈의 한반도톡] 남북화해의 서막 연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떠올릴만한 이 발표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7월 7일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 의해 나왔다.

북한과 적대관계 청산을 선언한 이른바 '7·7선언'이다.

그리고 이 선언은 1989년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으로 이어졌다.

노 전 대통령은 그해 9월 11일 국회특별연설을 통해 대한민국의 통일방안을 제시했고, 이 방안은 지금까지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방안의 핵심은 통일로 가는 과도적 체제로 '남북연합'을 제시하고 있다.

통일이라는 지난한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남북연합을 통해 남북간 협력과 소통을 실현해 통합의 기반을 닦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최고의결기구로 '남북정상회의', 남북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남북각료회의', 남북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남북평의회', 이를 위한 실무문제를 관장하는 '공동사무처' 등을 두고 서울과 평양에 상주 연락대표를 파견하도록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통일방안은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해 초당적 지지를 받았다.

특히 노태우 정부는 통일방안을 발표하던 1989년 경기도 파주시에 통일동산을 조성했고, 노 전 대통령 측은 이미 지난 6월께 이곳을 찾아 장지로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북한이 대화에 호응하면서 1990년 9월 4일에 남북한의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됐고 1992년 10월까지 8차에 걸친 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다.

1991년 12월 제5차 회담에서는 '남북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올해로 30주년을 맞는다.

합의서에서 남북은 당장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공동 인식 아래 상호 인정, 군사적 불가침, 교류·협력을 통한 점진적 통일을 천명했다.

사실 기본합의서 이후 나온 남북 합의는 대부분 이 합의서의 아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위한 기본을 담았다.

노태우 정부 시절 숨가쁘게 진행됐던 소련·중국 수교 등 북방외교 와중에서도 남북관계는 획기적 진전을 보였다.

[장용훈의 한반도톡] 남북화해의 서막 연 노태우
고위급회담으로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타는 가운데 1991년 8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남북한 유엔 가입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같은 해 9월 17일 유엔총회는 남북한과 마셜군도 등 7개국의 유엔가입 결의안을 일괄 상정하여 표결 없이 통과시켰다.

남한과 북한이 각각 개별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하게 된 셈으로, 헌법상 영토조항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관계는 국제사회에서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된 셈이다.

이런 성과 뒤에는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가동하던 남북간 비밀라인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비밀라인은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6년 3월 남측의 장세동 안전기획부장과 박철언 안기부장 특보, 북측의 허담 대남비서와 한시해 통일전선부 부부장 사이에 직통전화를 설치해 핫라인으로 운용됐으며, 이는 이른바 '88라인'으로 불렸었다.

이 라인은 노태우 정부에서 박철언 특보가 안기부에 있을 때는 안기부에,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청와대로 사람을 따라 움직여 다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런 비공개 채널을 활용해 당시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가운데 1990년 10월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이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정상회담을 타진했다.

서 전 안기부장은 1994년 8월 한 인터뷰에서 북측의 고려연방제 통일안과 남측의 한민족공동체 통일안은 나름대로 연구해 만든 것이니 이 두 안을 가지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위원회를 만들자는 취지의 제안까지 했다고 밝혔다.

물론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김 주석이 정상회담 대신 정치회의를 주장하고 연방제안의 수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후 북한은 1992년 봄 윤기복 당시 노동당 대남 담당 비서를 서울에 비밀리에 보내 그해 4월 15일 노태우 대통령을 평양으로 초청해 정상회담을 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김일성 생일에 맞춘 정상회담 제안은 대외선전용이 될 가능성이 컸던 만큼 노태우 정부는 거부했다.

[장용훈의 한반도톡] 남북화해의 서막 연 노태우
남북교류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금강산 관광사업도 출발은 노태우 정부에서부터였다.

북한이 고향인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1989년 1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나고 금강산 관광사업의 기초가 된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막후에서 정 명예회장의 방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화해협력정책으로 가시적 남북관계 진전이 가능했던 것도 사실상 노 전 대통령이 그 기초를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김종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과 이홍구 국토통일원 장관 등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에서 외교안보수석과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을 지내며 남북정상회담과 화해협력시대를 이끌어 '햇볕정책 전도사'로 불리는 임동원 전 장관의 발탁도 노 전 대통령에 의해서였다.

임 전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 냉전이 종식됐을 때 처음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졌고 김대중 정부 시절 대북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했던 것이 그 두 번째 노력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회고 속에 노 전 대통령은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면서 "생애에 이루지 못한 남북한 평화통일이 다음 세대들에 의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을 유언으로 남겼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