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제도 본딴 성폭력 전담기구 설치…성범죄 전담 재판부도 신설
전시 염두에 두고 군이 군을 수사·처벌하는 현재 시스템 변화 필요
[김귀근의 병영톡톡] 군의 '주적'이 된 성범죄…수뇌부 잇달아 고개 숙여
"군의 '주적'은 성범죄다.

"
군 관계자의 자조 섞인 푸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요즘 국방부를 비롯한 전군 지휘관들은 '성범죄'를 막는데 온통 신경을 곤두세운다.

성범죄가 군의 주적으로 인식될 정도로 군내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6월 한 달간 국방부에 접수된 성폭력 신고 사례를 보면 부하 여군의 머리를 쓰다듬거나 악수를 할 때 손을 비벼대며 추근대는 행위는 예삿일이 됐다.

이런 행위들이 성범죄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거나, 성 인지력이 무감각해진 결과로 보인다.

군의 한 관계자는 10일 "최근 여러 경로로 접수되는 성범죄 사례가 사안의 경중을 떠나 책 한 권을 쓸 정도"라고 말했다.

어쩌다 군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훈련 부족이다', '양성평등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집단주의가 강한 군대문화'라는 등 원인 분석도 다양하다.

"성폭력 피해를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폐쇄적인 남성 중심의 군대문화 때문"이라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장미혜 선임연구위원 지적도 설득력 있어 보인다.

지난 7일 열린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 때 한 참석자는 "저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저 부대가 그럴 부대가 아닌 데라는 안일한 생각이 잘못된 관행으로 이어졌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사실 군에서 성범죄가 발생하면 가해자에 대해 "능력 있는 군인인데, 어쩌다가…"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한다.

군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되는 전형적인 온정주의, 제 식구 감싸기 발언이다.

◇ 국방부 장·차관 연이은 사과…빛바랜 군복
사흘 전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군인들의 군복은 '당당하게' 보이기 보다는 빛이 바랜 느낌이었다.

표정이 어두우니 당연히 군복도 칙칙해 보였다.

참석자들은 2시간가량의 토론 시간에 '반성'을 했다고 한다.

당시 회의를 주관한 서욱 국방부 장관은 지난달 말 발생한 국방부 직할부대 소속 육군 준장 성추행 사건을 거론하며 "대단히 부끄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사과했다.

박재민 국방부 차관도 9일 합동수사단의 공군 이 모 중사 성추행 사망 사건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으로 군인으로서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한 고인과 유족분들께 고개 숙여 사과드리며, 삼가 깊은 조의를 표한다"고 고개를 떨궜다.

국방부 장·차관이 이틀 간격으로 '사과'를 하는 전례 없는 풍경을 연출했다.

[김귀근의 병영톡톡] 군의 '주적'이 된 성범죄…수뇌부 잇달아 고개 숙여
국방부는 군내 잇단 성범죄에 대한 해법 마련을 위해 지난달 28일부터 민관군 합동위원회를 가동했다.

합동위원회는 박은정 전 국민권익위원회 위원장과 서욱 국방부 장관을 공동위원장으로 ▲ 장병 인권 보호 및 조직문화 개선(1분과) ▲ 성폭력 예방 및 피해자 보호 개선(2분과) ▲ 장병 생활 여건 개선(3분과) ▲ 군 사법제도 개선(4분과) 등 4개 분과로 구성됐다.

이들 분과는 현재까지 논의된 결과를 이르면 오는 주말께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국방부는 2014년 성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뒤 이듬해 3월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성범죄 가해자는 '원아웃' 퇴출하고, 성희롱 가해자는 진급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성범죄를 저지른 현역 군인에게는 정직(1∼3개월), 계급 강등, 해임, 파면 등의 중징계를 내려 현역 복무 부적합 심의도 받도록 했다.

하지만 이런 대책도 약발을 받지 못했다.

6년 만에 국방부와 합동위원회가 또 어떤 대책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 각 군 총장 직속 검찰단 창설 방안 검토…외국 민간법원서 재판
국방부 동향을 보면 미국 국방부 산하 '성폭력 예방대응국'(SAPRO)을 모델로 한 '성폭력 예방 및 대응 전담 조직' 신설안이 발표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 전담 조직은 국방부 장관 직속으로 설치된다.

미국의 SAPRO는 성범죄 피해 신고가 접수되면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알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사건을 처리한다.

성범죄 예방 교육과 피해자 법률 지원, 정신적 피해 지원 등 체계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특히 피해 발생 시점부터 최종 판결까지 전담해서 지원한다.

성폭력 피해자 지원 전문 인력도 육성한다.

[김귀근의 병영톡톡] 군의 '주적'이 된 성범죄…수뇌부 잇달아 고개 숙여
아울러 군사법원에 성범죄 전담 재판부를 두고, 성폭력 전문수사팀을 설치하는 방안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성범죄 전담 재판부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군사법원법 개정안과 충돌되어 실제 정책으로 결정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민주당 '군 성범죄 근절 및 피해자 보호 혁신' 태스크포스(TF)는 지난달 군 성범죄에 대해 민간이 수사와 기소, 1심 재판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군사법원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군내 팽배한 온정주의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합동위원회에서는 사단급 부대에 설치된 수사 조직을 개편해 육·해·공군총장 직속의 검찰단을 창설하는 국방부 안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일각에서는 군검찰단의 권한이 더욱 막강해질 수 있고, 이를 견제할 군내 감시 장치는 없어 군검찰이 지휘권을 침해하거나 부실 수사를 할 가능성 등을 우려한다.

또 군이 군을 수사하고 처벌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어서 군내 실효성 있는 변화를 이끌지도 의문이다.

사실 현재 군의 사법체계는 평시가 아닌 전시를 염두에 두고 군이 군을 수사하고 재판하도록 하고 있어 '제식구 감싸기'가 필연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독일은 군검찰 조직이 없고, 군 관련 범죄에 대한 수사·기소는 일반 검사가 담당한다.

프랑스도 전국 지방법원 군사전문부에서 군사재판을 담당하고 민간 검사가 군인 관련 사건을 처리한다.

대만도 평시 군사법원 및 군검찰 운영을 중단하고, 관련 업무를 전부 민간법원 및 검찰로 이관했다.

국방부는 다른 나라 사례를 들어 국방부 방안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군내 성범죄 관련 피해자가 민간인이면 민간법원으로 재판권을 이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치권에서도 찬성하는 '군인권보호관' 제도는 도입이 확실시된다.

군대 내 인권침해 조사와 권리 구제를 담당할 군인권보호관은 2014년 19대 국회에서 논의됐으나 지지부진하다가 군 옴부즈맨 제도로 변질했다.

이밖에 현재 일부 공공기관에서 활용 중인 모바일 앱 '리슨투미(Listen2me)'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이는 군내 여러 개의 신고·고충 처리체계를 외부기관이 운영하는 모바일 앱으로 통합하는 방안이다.

같은 가해자에게 비슷한 피해를 본 사람들끼리 익명으로 연대해 공동으로 신고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피해 기록은 신고자와 가해자 신원 등이 암호화돼 서버에 저장되는데, 동일 가해자를 지목한 다른 피해 신고자가 발견되면 앱에서 자동으로 이전 신고자에게 알림을 보낸다.

합동위원회는 앞으로 부대 현장 점검과 실태 조사, 관계부처 협의 등을 통해 성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안을 만들 계획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