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첫 한소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첫 한소정상회담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만일 소련이 헝가리식으로 한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면 모스크바 주재 대사관 이외 공식사절단을 전원 철수하겠다.”

김일성 북한 주석은 1989년 1월 평양을 방문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당시 소련 외무장관에게 이같이 말합니다. 헝가리는 대한민국이 최초로 수교한 공산권 국가입니다. 북한이 최대 우방국이자 당시 공산권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에 한국과 수교하면 대사관 철수 직전의 모든 외교 조치를 취하겠다고 사실상 협박한 것입니다.

같은달 쌍용건설의 초청으로 서울을 찾은 미카엘 스테클로브 소련 연방상공회의소 고문은 KOTRA와의 면담에서 김일성의 이같은 발언을 공개합니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소련으로 돌아가 말케비치 연방상의 회장을 불러 김일성의 이같은 입장을 전달하고 “당분간 한국 정부 당국과 일체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소련은 당시 한국 정부와의 공식 관계 수립을 검토했지만 이를 취소하고 대신 소련 연방상의와 한국 KOTRA와의 협력관계를 수립하는 것으로 대체합니다.
외교부는 지난달 30년 경과 외교문서 2090권(33만 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 및 도서관 등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뉴스1

외교부는 지난달 30년 경과 외교문서 2090권(33만 쪽 분량)을 원문해제 요약본과 함께 일반에 공개했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원문은 외교사료관 내 '외교문서열람실'에서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 외교문서 공개목록과 외교사료해제집 책자는 주요 연구기관 및 도서관 등에 배포되며, 외교사료관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진=뉴스1

이같은 내용은 외교부가 지난달 29일 공개한 30년 경과 외교 문서에 포함됐습니다. 이날 일반에 공개된 외교문서는 총 33만쪽에 달하는 분량으로 대부분 1990년에 생산됐습니다. 한·소 수교와 유엔가입 등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현장의 비화가 대거 포함됐습니다.
작전명 '태백산' 한·소 수교 작전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23층 타워룸에서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간의 첫 한·소 정상회담입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앞서 “함께 협력해 아시아와 한반도에도 평화구도를 함께 구축하자”며 “김일성도 남북 대화와 개방 개혁을 촉구할 것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한·소 정상회담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명 아래 두 달 간 극비리에 추진됩니다. 양국 모두 북한의 격렬한 반발을 의식했습니다. 노 대통령은 같은해 4월 방미 계획을 보고받던 중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6월 말로 예정된 방미 계획을 한 달여 앞당겨 추진한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우리와의 대화나 접촉을 거부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남북 관계를 푸는 최상의 길은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라며 미국에서의 한·소 정상회담을 지시합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사진=타스연합뉴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사진=타스연합뉴스

소련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받지 못하던 노태우 정부는 막후 채널을 통해 소련에 거듭 회담을 제의합니다. 당초 한국은 제3국에서의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결국 회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결정됩니다. 회담 시간과 장소는 회담을 이틀 앞두고서야 확정됩니다.

북한은 한·소 정상회담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위해 방미 계획을 늦추자 북한 노동신문은 같은해 5월 21일 논평을 내고 “노태우의 미국 행각은 미·소 정상회담과 시간적으로 일치하며 소련 국가수반과 상봉, 수교문제를 결착지으려는 의도”라며 “노태우는 인민들의 반정부 투쟁으로 미국행각이 파탄된데서 교훈을 찾고 민족분단 책동을 그만둬야 한다”고 맹비난합니다. 같은달 31일 북한 외교부 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소 정상회담이 실현되면 이것은 한반도의 분단 고착화와 관계에 중대한 정치적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북한은 거세게 반발했지만 한·소 양국 간 고위급 교류는 첫 정상회담 뒤 가속화됩니다. 양국 외교장관은 네 달 뒤인 9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회담을 갖습니다. 회담에서 최호중 외무부 장관은 “떳떳하고 올바른 일을 할 때는 그것을 주저하거나 늦출 필요가 없다”며 “우리가 처음 회담을 갖는 날 바로 수교하게 되면 더욱 뜻깊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당초 이듬해 1월1일 수교하기로 한 계획을 당일로 앞당기자고 깜짝 제안한 것입니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은 이에 대해 같은 날 유엔에서 열린 '아동을 위한 세계정상회담'을 언급하고 “오늘은 특히 세계 정상들이 모여 우리 후손들의 미래를 논의하는 역사적인 날이 아닌가”라며 동의합니다.

소련이 최 장관의 ‘당일 수교’ 제안에 동의하며 역사적인 수교가 이뤄집니다. 멀게는 40년 전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고, 가깝게는 7년 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으로 최악의 관계를 유지하던 ‘적성국가’와의 수교였습니다. 소련과의 수교는 이듬해 한국의 유엔 가입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공산권 개혁·개방의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0년 뒤 美·北 수교 중재자 자처한 한국
2019년 6월 진행된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2019년 6월 진행된 남북미 판문점 회동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가운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북한이 앞장서서 한국과 소련의 수교를 반대한 것과 달리 한국이 앞장서서 북한과 미국의 수교를 위해 중재에 나선 것입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기자간담회에서 종전선언을 묻는 질문에 “우리는 모든 주변국들, 러시아·중국·일본·미국과 우호·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러시아·중국과의 관계는 우호·협력 관계라고 하지만 미국·일본과는 정상적인 외교 관계조차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는 북한과 미국·일본 간의 관계 정상화를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종전선언이 북·미 관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양국 간의 뿌리 깊은 불신을 해소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단계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종전선언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9년 6월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남북은 분단되어 있고, 북한은 미국, 일본과 수교를 맺지 않았다”며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정착은 동북아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구도의 완전한 해체를 의미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우회적으로나마 미·북 수교와 북·일 수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인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정책도 미·북 수교를 중요한 단계로 삼고 있습니다. 종전선언을 통해 미·북 양국이 신뢰를 회복한 뒤 양국 수교와 남·북·미 3자가 참여하는 평화협정 체결까지 나아가자는 것이 골자입니다. 미·북 양국이 불가침 협정을 맺고 수교를 맺으면 냉전의 산물인 정전체제가 사실상 해체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인식에 기초합니다.

하지만 2019년 미·북 하노이 정상회담이 사실상 결렬된 후 이러한 정부의 장밋빛 구상도 멈춰버린 상황입니다. 미국 백악관은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직접 만날 의향이 있냐는 질문에 “(직접 만나는 것은) 그의 의도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한국 정부는 끊임없이 대화를 제의하고 비핵화 정책의 핵심을 미국과 북한 간의 담판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지만 북한은 올해 들어서만 세 차례의 미사일을 발사하며 이러한 한국 제안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1990년 한·소 수교를 “민족 분단 책동”이라 표현한 북한, 2019년 미·북 수교를 “냉전구도의 완전한 해체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 정착”라 표현한 남한. 공교롭게도 두 ‘한국’의 상반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역사는 남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을 어떻게 기록할까요.

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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