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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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성단체로 구성된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공동행동)은 최근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캠페인을 기획했지만, 서울시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선거법 위반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비위로 치르는 선거라는 걸 알리기 위한 이 캠페인이 “선거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에서다.

#2.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단체들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약인 대운하 반대 운동을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 선관위는 “선거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선관위가 자의적 해석으로 국민의 참정권을 제약한다”고 반발했다.

○민주주의 위협하는 선관위

선거 때마다 선관위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선거의 심판 역할을 해야 할 선관위가 ‘적극적인 플레이어’ 역할을 자처하면서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선관위의 ‘무기’가 된 공직선거법은 각종 금지 조항과 처벌 조항으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지난 23일 공동행동은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문구를 선거법 위반으로 규정한 선관위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선거법 제90조 위반이라고만 공동행동 측에 통보했을 뿐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서울시 선관위 관계자는 ‘해당 캠페인이 어떤 점에서 선거법 위반이냐’는 한국경제신문의 질의에 “입장을 정리 중”이라며 답을 피했다. 선거법 위반이라는 결론만 내려놓고 제대로 된 근거를 내놓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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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선거법

선관위의 이런 전횡은 포괄적이고 모호한 선거법에 근거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컨대 선거운동을 규정한 선거법 제58조에 따르면 선거운동은 ‘당선되거나 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를 말한다. 유권자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하도록 한 모호한 규정이라 선관위의 자의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클 수밖에 없다.

선거법상 금지 조항도 상당하다. 지난 19일 선관위가 야권 단일화를 촉구하는 광고를 낸 일반 시민에게 선거법 위반을 통보하면서 내세운 근거는 제93조다. 해당 조항은 선거 180일 전 ‘지지·추천하거나 반대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거나 정당의 명칭 또는 후보자의 성명을 나타내는 광고’를 금지하고 있다. 광고에 지지나 반대가 아닌 단순히 정당 이름과 후보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법적 잣대를 들이댄 것이다.

선거법에는 선거운동을 할 때 사용하는 명찰이나 어깨띠, 소품 크기까지 세세하게 규정돼 있다. 어깨띠는 ‘길이 240㎝, 너비 20㎝ 이내’여야 한다. 마스코트, 표찰 등의 소품은 ‘한 손으로 지닐 수 있는 정도의 크기’여야 한다.

선거법의 처벌 조항 역시 과도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예컨대 여성단체들의 ‘보궐선거 왜 하죠’라는 현수막 게시는 시설물 설치를 금지한 선거법 제90조 위반에 해당해 최대 징역 2년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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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규제’ 없는 미국

미국은 선거자금 부분을 제외하고 선거운동에 규제가 없다시피 하다. 직접 방문하거나 전화, 이메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유권자에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선거에서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은 누구든지 투표 참여를 권유하는 행위는 할 수 있지만 △직접 방문하거나 △투표소 100m 안에서 권유하거나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포함해 지지·추천 또는 반대하거나 △현수막, 어깨띠, 표찰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58조2)

선거법이 헌법 위에 있다는 비판에 따라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제기돼왔다. 2019년 참여연대는 “정치적 침묵을 강요하는 선거법을 개정하라”며 관련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국회는 물론 선관위조차 적극적인 개정 작업에 나서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논란이 거듭되자 선관위는 26일 “국민의 법 감정과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규제 위주라는 지적에 깊이 공감한다”며 향후 법 개정 의견을 제출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의 선거법은 너무 복잡하고 과도한 규제로 인해 민주적 선거를 오히려 저해하고 있다”며 “금권 선거, 관권 선거에 대한 금지 규정만 두고 나머지는 없애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미현/이동훈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