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국회가 본격 문을 연 지 3일만에 발의된 의원 법안이 100건을 넘어섰다. 발의된 법안만 2만5000건에 달했던 2지난 국회에 이어 이번 국회에서도 ‘막무가내 입법’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이다. 법안이 양적으로 폭증하면 실제 중요 법안에 대한 체계적이고 신중한 검토와 심사가 어려울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하루 새 무더기 발의 4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은 이날 오전까지 119건에 달한다. 전날 국회가 본격 문을 연 지 3일만에 100건을 넘어섰다. 박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마을기업육성지원법, 평화경제특별구역 지정법 등 6개 법안을 지난 1일 무더기로 발의했다. 윤관석 민주당 의원도 주택법 개정안 등 5건을 발의하면서 뒤를 이었다. 같은 당 안에서 비슷한 내용의 법안이 같은 날 잇따라 발의된 사례도 나왔다. 신현영·정춘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1일 질병관리본부를 청으로 승격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각각 대표 발의했다. 민주당 소속인 남인순 의원 정춘숙 의원은 각각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과 스토킹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을 발의했다.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 스토킹범죄에 대한 수준을 높이는 내용이다. 실현 가능성이 적은 법안을 발의한 의원도 있다. 서삼석 의원은 노인 정책만을 담당하는 노인행복부, 농림축산식품부의 가축전염병 대응 업무와 보건복지부의 감염병 대응 업무를 담당하는 방역부를 각각 신설하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별도로 발의했다. 이개호 민주당 의원은 재정난에 시달리는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하면 세금 혜택을 주는 내용의 고향사랑 기부금에 관한 법을 제출했다. 일부 의원은 지역구에 대놓고 특혜를 주는 법안을 제출했다. 조경태 미래통합당 의원은 부산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내용의 부산해양특별시 설치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안했다. 두산중공업 본사가 있는 경남 창원이 지역구인 강기윤 통합당 의원은 원자력발전소 가동 중단 등에 따른 피해조사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발의했다. 법안에는 원전 가동 중단에 따른 기업과 지역 주민에 대한 피해보상 내용이 담겨 있다. 지난 국회 발의 역대 최다의원들의 ‘아니면 말고 식’의 입법은 국회를 거듭할 수록 심해지고 있다. 16대 국회에서 발의된 의안건수는 3254건이었다. 17대 국회에서 8592건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난 발의건수는 18대 국회(1만4947건)에 들어와 1만건을 넘어섰다. 19대(1만8926건) 20대 국회에서는 2만5521건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의정활동에 대한 평가를 법안 발의건수로 하는 관행이 의원들의 ‘건수 부풀리기’를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20대 국회에서 법률소비자연맹이 의정활동 1위로 꼽은 황주홍 전 민생당 의원은 642건의 법안을 발의했다. 이 가운데 218개 법안이 여성이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 받을 수 있도록 각 기관에 유리천장위원회를 설치하자는 내용이다. 각 기관별 법안에 똑같은 조항을 삽입하는 식의 대표적인 건수 부풀리기 사례다. 문제는 졸속 입법이 늘어나면서 실제 처리가 필요한 법안에 대한 차분한 논의가 어렵다는 점이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 중에서도 위헌이나 헌법불합치로 결정되는 사례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김민호 성균관대 교수는 “의원 입법은 정부 입법에 비해 의견 수렴이나 평가하는 과정이 까다롭지 않다”며 “의원 입법에도 사전 입법영향분석제 도입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
21대 국회가 출범과 함께 ‘기본소득 도입’ 논의로 불붙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3일 ‘물질적 자유’를 내세우며 기본소득 정책 추진을 공식화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도 “여야 간 공통 의제”라며 관련 법 제정 등 정책 경쟁에 뛰어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국민 의견 수렴과 재원 마련 논의도 없이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 속도전’이 펼쳐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김 위원장은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통합당 초선 모임에 참석해 “실질적·물질적 자유를 당이 어떻게 구현해내느냐,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보수가 지향하는 가치인 자유는 말로만 하는 형식적 자유”라며 “배고픈 사람이 돈이 없어 빵을 먹을 수가 없다면 무슨 자유가 있겠냐”고 지적했다. 김 위원장이 언급한 ‘실질적 자유’는 1986년 벨기에에서 창립된 비정부기구(NGO)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가 주창한 개념으로, 기본소득의 이론적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민주당 일각에서는 “여야 간 기본소득 논의를 본격화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두관 의원은 이날 SNS에 “김 위원장의 기본소득 입장이 통합당 당론이 된다면 우리 정치는 정책 경쟁 시대를 열게 될 것”이라며 “이제 본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일부 의원은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소병훈 의원은 기본소득위원회 설립 등을 담은 기본소득법안을 이르면 이달 발의할 계획이다.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본소득 도입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스위스처럼 의견 수렴 과정이 있어야 한다”며 “연간 수백조원의 재정이 소요될 수 있는 정책인 만큼 기존 복지 구조조정 등 재원 마련 방안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의견 수렴·재원 마련은 뒷전…'기본소득' 일단 주고 보자는 정치권한국 기본소득 '돈 뿌리기' 초점…개념·도입취지 달라“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면서 논의는 소수 정치인을 중심으로 중구난방으로 이뤄지고 있다.”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한국의 기본소득 논의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핀란드와 스위스, 네덜란드 등 다른 나라에서 시도된 것과 전혀 다른 방식의 제도를 신중한 논의 없이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근로의욕 고취가 목표였던 핀란드, 기존 복지제도 개편이 중심인 스위스 등과 달리 한국의 기본소득은 “월 얼마를 주겠다”는 ‘돈 뿌리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다른 나라들이 전문가를 중심으로 논의해 제한된 집단을 중심으로 실험이 이뤄지고, 철저한 평가를 거쳤던 것과도 대비된다.목표부터 달랐던 핀란드한국의 기본소득 도입 논의는 특정 연령대나 특정 직업 종사자의 사정이 어렵다는 주장이 나올 때마다 확대됐다. 2015년 경기 성남시의 청년배당, 2019년 전남 해남군의 농민수당 도입 등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 경제적 효과 등에 대한 객관적인 검토 없이 해당 지방자치단체장의 정치적 의지에 따라 도입됐다. 다른 지자체도 비슷한 제도를 도입하며 확대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관련한 지원금 지급도 지난 3월 전북 전주시를 시작으로 다른 지자체로 퍼지더니 5월 정부 차원의 지급으로 이어졌다.하지만 외국의 기본소득 도입 과정에는 구체적인 정책 목표가 제시됐다. 핀란드의 2017년 기본소득 실험은 전체 사회복지 지출 비용은 줄이고 근로의욕을 높이기 위해 계획됐다. 실업수당이 지나치게 많아 일자리를 구하기보다 실업수당에 안주한다는 문제 제기에 따른 것이다. 실업자에게 매달 560유로(약 76만원)의 기본소득을 구직활동을 하지 않거나 직업을 새로 구하더라도 계속 지급하는 조건이었다.2016년 기본소득을 국민투표에 부쳤던 스위스도 마찬가지다. 모든 성인에게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17만원)을 지급하겠다고 했지만 기존 복지제도를 대폭 줄여 재원을 조달한다는 전제가 달렸다. 기존 복지제도 혜택의 상실을 우려한 서민층을 중심으로 국민 77%가 반대표를 던졌던 이유다.이상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는 “기존 복지제도와의 관계를 말하지 않고 ‘얼마를 주겠다’는 말부터 하는 국내 일각의 기본소득 도입 주장은 정치적으로 수상한 목표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정치권 중심 논의도 우려돼”논의 과정도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일부 정치인이 아젠다를 주도하며 정부와 다른 전문가그룹이 끌려가는 모양새다. 2017년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기본소득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재명 경기지사는 경기도 자체 사업으로 ‘기본소득 박람회’를 여는 등 관련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심상정 의원을 중심으로 한 정의당과 시민단체들도 기본소득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까지 호응하고 나서며 정치권의 기본소득 논의가 불붙고 있다. 이 지사는 “K방역도 성공했는데 기본소득을 중심으로 한 K경제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논리’로 재원 등 현실적 문제를 덮고 있다.하지만 핀란드와 네덜란드, 캐나다 등의 기본소득 실험은 △전문가 논의 △구체적인 계획안 제시 △한정된 지역 및 인구를 대상으로 한 실험 △냉정한 평가 등을 거치고 있다. 핀란드는 기본소득 지급 2년 전인 2015년 5월부터 구체적인 도입 방안을 놓고 논의가 시작됐다. 무작위로 선정한 만 25~28세 실업자 2000명에게 2년간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안은 이를 통해 도출됐다.2년간의 실험을 거치며 핀란드 정부는 이들의 노동시장 참여도, 행복도 증가 등 여러 지표를 기본소득이 지급되지 않은 다른 대조군과 냉정하게 비교했다. 지난달 6일 기본소득 실험 최종 결과를 발표하며 핀란드 정부가 “기본소득은 수급자의 취업일수를 늘리는 데 거의 효과가 없었다”며 “보편적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큰 비용에 비해 충분한 효과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이유다.최한수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기본소득은 막대한 부담이 오래 간다는 점을 감안해 특정 지역에 시범 실시하는 등 냉정한 설계와 효과 관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임도원/성상훈/노경목 기자/런던=강경민 특파원 van7691@hankyung.com
21대 국회가 열리자마자 114건의 법안이 쏟아졌지만 상당수는 법 시행에 필요한 재정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발의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안 접수 때 함께 제출하도록 한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법안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 국회가 법안의 타당성과 재원 조달 방법을 검토하지 않은 채 보여주기식 입법 경쟁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법안 앞다퉈 쏟아냈지만…3일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의안 접수가 시작된 지난 1일부터 이날 오후 6시까지 사흘간 총 114건의 법안이 발의됐다. 같은 기간 65건이 접수된 20대 국회와 비교하면 49건(57%) 더 많다. 15대 국회는 접수 시작 후 1주일간 0건, 16대 6건, 17대 23건, 18대 11건, 19대 56건의 법안이 접수됐다. 21대 국회의원들이 ‘입법 속도전’에 들어가 초반부터 많은 법안을 쏟아내고 있는 모양새다.문제는 이 중 상당수가 재정 투입이 필요한 법안임에도 기본적인 비용추계조차 없이 발의됐다는 것이다. 이날 민홍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노인 교통비 국고 지원안은 예산 지원이 수반되지만 따로 비용 계산은 돼 있지 않았다. 이명수 미래통합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지방세특례제한법 개정안에도 임대료를 인하한 상가건물에 세금을 공제해준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국회 예산정책처에 비용추계요구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국회 관계자는 “국회법상 예산 조치가 수반되는 법안을 발의할 때 비용추계서를 함께 제출해야 하지만 급하게 내다 보니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발의된 법안 114건 중 비용추계서가 첨부된 법안은 장제원 통합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장애인법 개정안이 유일하다.대학등록금 반환 지원과 자영업자 손실보전 등의 내용이 담긴 통합당의 1호 법안도 비용추계가 부실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총 대학등록금(14조원 상당)의 약 10%에 정부가 반환을 지원한다고 가정하면 1조40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관련 비용추계는 이뤄지지 않았다. 영업 중단 등으로 피해를 본 병원과 자영업자 등의 손실을 국고로 보전하는 감염병예방법 개정안도 마찬가지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233개 의료기관에 지급한 손실보전금이 1700억원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전체 자영업자로 범위가 넓어질 경우 필요한 예산은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재탕·삼탕 법안이 ‘절반’이전 국회 때 폐기된 법안을 ‘재탕’ ‘삼탕’해 발의한 것도 전체 발의 건수의 절반(51건)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일 의안과 접수대가 열리자마자 박광온 민주당 의원이 제출한 사회적 가치법은 19대 국회 때 문재인 대통령이 의원 시절 발의했지만 자동 폐기된 법이다. 박 의원이 재발의한 20대 국회에서도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했다. 부양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모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민법 개정안(일명 구하라법)과 사회서비스원 설립법, 스토킹법 등도 빠르게 재발의됐다. 20대 국회 종료를 18일 앞두고 송석준 통합당 의원이 발의했던 건설기술진흥법 개정안 역시 21대 국회 의안과 업무 첫날 다시 등장했다.국회가 정밀한 재정추계나 타당성 검토 없이 ‘입법 속도전’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대 국회 1호 법안인 박정 의원의 통일경제특구법과 2호 법안이자 당시 새누리당 1호 법안으로 발의된 빅데이터법, 3호 근로기준법 개정안, 4호 정부조직법 개정안, 5호 교육기본법 모두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대 국회에서만 역대 최대 규모인 1만5002건의 법안이 폐기됐다. 의원 입법 폭증세와 함께 법안 폐기율은 62.2%로 치솟았다.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