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트랙 충돌에도 마지막 중재 노력…강제징용 해법 '문희상안' 내놓기도
입법부 지휘봉 내려놓은 문의장…"의회주의자로 남겠다"
'의회주의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를 끝으로 입법부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문 의장은 본회의 인사말을 통해 "소용돌이치던 정치 테두리 안에서 40년 가까운 인생을 보냈다.

아쉬움은 남아도 후회 없는 삶이었다"며 의장 임기를 마무리하는 소회를 밝혔다.

문 의장은 "지난 2년 절절한 마음으로 국회와 한국정치가 나아갈 길을 고언해 왔다.

좀 더 나은 의회주의의 길을 열고자 했기 때문"이라며 "모든 것이 다음세대를 위한 정치가 실현되기를 원했던 노정객의 충정이었다고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다"고도 했다.

문 의장은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여야가 격돌한 지난 2년 입법부의 수장으로 마지막까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해 왔다.

국회는 다른 의견이 충돌해 시끄러워야 하지만, 마지막에는 민의를 하나로 수렴해야 한다는 그의 신조 덕에 여야가 극한 충돌 속에서도 파국만은 피했다는 평이 나온다.

협치에 대한 강조는 그가 여야 지도부를 만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내놓은 조언이었다.

'여의도 포청천'(중국 송나라 시절의 강직하고 청렴한 판관)으로 불리는 문 의장은 경기 의정부에서만 6선을 지냈다.

1980년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쫓아 동교동계에 몸담았고,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와 처음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15대 총선에서 한 차례 고배를 마신 뒤엔 16∼20대에서 내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참여정부 시절 초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고, 이후 열린우리당으로 복귀해 2005년 4월 당 의장으로서 여당을 이끌었다.

하지만 재보궐 선거 참패와 지지율 하락으로 취임 6개월 만에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문 의장은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2013년 1월 대선 패배로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전신) 지도부가 사퇴하는 등 당이 휘청이자 비대위원장으로 나서 당을 이끌었다.

이듬해에는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 박영선 당시 원내대표 사퇴로 두 번째 비대위원장을 맡았다.

의장 재임 기간에는 여야의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 합의를 이끌어냈고, 의원외교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12개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의회외교포럼을 출범시켜 가동했다.

여야가 동물국회를 재연하며 격렬히 대치한 '패스트트랙 정국'에서는 공직선거법 개정안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법안 처리 과정에서 의장의 재량권을 활용하는 결단으로 마지막 역할을 했다.

거친 외모와 달리 섬세한 정치 감각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겉은 장비, 속은 조조'라는 별명이 마지막까지 그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회에서 손꼽히는 '일본통'인 그는 냉각된 한일관계를 풀 실마리를 찾기 위해끝까지 노력한 것으로도 평가받는다.

지난해 말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해법의 하나로 이른바 문희상 안(案)으로 불린 기억·화해·미래재단법 제정안을 발의했다.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1+1+α)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으로 '기억·화해·미래 재단'을 설립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또는 위로금을 지급하는 내용이다.

문 의장은 평소 논어의 정명 개념을 빌려 "청청 여여 야야 언언"이란 말을 즐겨 했다.

청와대는 청와대답고, 여당은 여당답고, 야당은 야당답고,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문 의장은 지회봉을 내려놓으며 "이제 평범한 국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 국민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국회를 늘 응원하겠다"며 "앞으로도 '국회는 민주주의의 꽃이며 최후의 보루'라는 믿음을 간직한 의회주의자로 남아있겠다"고 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