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국자 담화로 불만 토로한 후 김정은이 수습하는 모양새
대미비난 쏟아내며 트럼프와도 '친서외교' 이어가…톱다운 외교 여지

남측을 향한 북한 지도부의 대남 메시지가 이틀 새에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모습이다.

지난 3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청와대를 향해 거친 비난을 쏟아내더니 하루 뒤 4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친서를 보냈다.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이런 행보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아직은 남아있는데다 향후 한반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서는 남북 간 '톱다운' 방식이 유효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지난 2일 있은 인민군 전선장거리포병부대의 '화력전투훈련'이 자위적 차원임을 강조하면서 이에 강한 우려를 표명한 청와대를 향해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김정은 위원장의 혈육이자 오른팔인 김여정 제1부부장의 데뷔 담화는 '주제넘은 실없는 처사', '바보스럽다', '저능하다', "세 살 난 아이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는 등의 막말이 담겼다.

김정은, 한미 정상엔 '깍듯'…정상간 신뢰로 정세관리 하나
자위적 차원의 군사훈련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훈련 규모는 물론 미국과 한국 비난도 자제하며 정세 관리를 하려고 노력했는데, 남측이 강한 반응을 보였다는 판단에 따라 '김여정 카드'로 맞대응한 것으로 읽혔다.

그런데도 김 제1부부장은 담화에서 "정말 유감스럽고 실망스럽지만, 대통령의 직접적인 입장표명이 아닌 것을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 것"이라며 청와대와 문 대통령을 분리해 대응했다.

청와대의 반응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격앙된 분위기, 나아가 김정은 위원장의 불쾌감을 김여정의 담화로 적나라하게 표현하면서도 나름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이어 김정은 위원장은 김 제1부부장의 청와대 비난 담화 다음 날 문 대통령에게 친서를 먼저 보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대해 남측 국민을 위로하고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 위원장과 김여정의 엇갈리는 대응은 의도적인 게 분명해 보이지만, 어찌했든 외형적으로는 김 제1부부장의 막말 담화를 김 위원장이 수습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의 경색 국면이 지속하고 소통마저 단절된 상황에서도 남북 정상의 톱다운 소통으로 최악의 대립과 갈등 상황만큼은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도가 담겼다는 분석이 나온다.

톱다운 방식의 소통은 김정은 위원장이 이미 2018년부터 대미 정상 외교에서도 즐겨 사용한 외교적 행위다.

김정은, 한미 정상엔 '깍듯'…정상간 신뢰로 정세관리 하나
북한 외무성과 대남 당국자들은 북미 비핵화 협상의 갈등 가운데서 거친 막말로 미국을 향해 불만을 쏟아내면서도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친분에 대한 발언을 줄곧 강조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지난해 10월 담화에서 "최근 미국이 우리의 인내심과 아량을 오판하면서 대조선 적대시 정책에 더욱 발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고 비난하면서도 "조미(북미)관계가 그나마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은 김정은 국무위원회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사이에 형성된 친분 덕분"이라고 말했다.

또 지난해 하노이 노딜 이후 북한 권정근 당시 외무성 미국담당국장(4월 18일)은 "일이 될 만하다가도 폼페이오만 끼어들면 일이 꼬이고 결과물이 날아난다"며 '협상 파트너 교체'를 요구하는가 하면, 외무성 대변인(5월 27일)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에 대해 '구조적으로 불량한자', '인간오작품' 등 미국을 향해 막말을 퍼부었다.

그러나 며칠 후 김정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6월 11일(현지시간)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 "매우 개인적이고 매우 따듯하고 매우 멋진 친서"를 받았다고 밝혔다.

당국자들의 대미 비난이 북미 정상간 친분 언급이나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로 누그러지는 모양새였다.

북한은 남측에 대해서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대화를 외면하고 비난전을 펴면서도 시종일관하게 남북관계에 여지를 남겨뒀다.

김정은, 한미 정상엔 '깍듯'…정상간 신뢰로 정세관리 하나
문 대통령과 남측에 대한 비난이 대외 선전 매체를 통해 이어지면서도 정작 주민들이 볼 수 있는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에서는 일절 공개되지 않는 흐름을 유지했다.

지난 한 해 외무성 등 당국자들이 많은 대남 비난 담화를 발표했지만, 단 한 번도 내부에 공개하지 않았고 특히 이번 김여정 제1부부장의 청와대 비난 담화 역시 조선중앙통신을 통해서만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6월 판문점 회동을 제안했을 때 김정은 위원장이 문 대통령의 회동에도 긍정적 입장을 보이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유지한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읽을 수 있다.

이에 따라 남북관계가 대화나 교류가 완전 중단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지만, 남북 정상 간 신뢰가 여전함을 보여준 만큼 언제든 관계가 복원될 기반만큼은 유지하려는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교수는 "핵심은 김여정이 담화에서 청와대와 대통령을 분리하는 속에서 수위조절을 하고 있고, 그 직후에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냈다는 것"이라며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의 여건 마련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고 분석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