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를 놓고 한동안 말들이 많았습니다.

해리스 대사는 미국 태평양 사령관을 지낸 군인 출신입니다.

당초 호주대사로 지명됐다가 갑작스럽게 한국에 오게 된 건 외교가에 잘 알려진 일입니다.

해리스 대사와 대화를 해보면 곤란한 질문에도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이해하기가 쉽지만, 외교관으로서는 지나치게 직설적인 게 아니냐 하는 어색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해리스 대사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정부가 추진하려는 '북한 개별관광' 문제에 대해 '남북협력이 제재를 촉발할 수 있다는 오해를 피하려면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 협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 개별관광은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와 신년회견에서 의욕적으로 제시한 사업입니다.

문 대통령은 신년 회견에서 "남북 간에도 이제는 북미 대화만 바라보지 않고 남북협력을 증진하며 북미 대화를 촉진해나갈 필요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주재국의 대사가 '제재'라는 민감한 단어까지 사용하며 그 나라의 대통령이 언급한 일에 개입한 것입니다.

외교적으로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여권 일각에서 '조선 총독'이라거나 '내정간섭 아니냐'는 날 선 비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논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과거 취재 현장에서 겪었던 'BDA(방코델타아시아) 사태'가 생각났습니다.

2005년 9월부터 2007년 6월까지의 일을 말합니다.

잘 알다시피 미국 재무부에 의한 BDA 제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5년 9월입니다.

북핵 6자회담의 최대 성과로 거론되는 9.19 공동성명이 어렵사리 도출된 것과 시기가 맞물립니다.

9.19 공동성명이 한국 측의 적극적인 행보와 맞물려 결국 합의됐을 당시 노무현 정부는 그야말로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BDA 제재로 인해 모든 일이 헝클어져 버렸습니다.

북한은 BDA에 동결돼있던 자국 자금 2천400만달러를 돌려받기 전에는 절대 비핵화 협상에 임하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 1차 핵실험을 강행해 한반도 위기지수를 끌어올렸습니다.

BDA 난기류를 헤쳐나가기 위해 노무현 정부는 백방으로 해결책을 모색했고, 결국 2007년 6월에야 'BDA은행 → 마카오 금융관리국 → 마카오 대서양은행 → 미 뉴욕연방준비은행 → 러시아 중앙은행 → 극동상업은행 → 조선무역은행'을 거쳐 2천400만달러를 북한에 돌려주고서야 협상의 동력을 살려냈습니다.

5년 임기의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1년 9개월의 세월은 그야말로 금쪽같은 시간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BDA 장애물을 치우고 나서야 시간을 재촉해 북한과 접촉한뒤 2007년 10월, 임기를 반년도 안 남긴 상황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2차 남북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그러나 임기 말의 합의, 그 이행을 담보할 수 없었던 허무함은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특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서 이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봤을 문 대통령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BDA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당시의 아픈 추억이 최근 정부가 추진하려는 '북한 개별관광'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문재인 정부에게는 2년 전에 좋은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4.27 남북정상회담, 6.12 북미 정상회담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연이어 진행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전환이라는 역사적 사변이 곧 현실화할 것 같은 기대감이 팽배했던 2018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남북 협력을 모색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우리 뿐 아니라 북한도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언급됐던 남북 사업이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문제였습니다.

이 때도 미국 재무부 등이 대북 제재 이행을 명분으로 사실상 제동을 걸었습니다.

한미 당국 간 협의 채널로 등장한 것이 '워킹 그룹'입니다.

최근 우리 당국자들의 입에서는 '주권'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2년 전에도 했던 말입니다.

정부가 북한 개별관광을 '주권 차원의 문제'로 규정하고 일반 국민들의 북한 방문을 허용하겠다는 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대북 독자 행보를 선언한 것으로 봐도 됩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물론 미국이 중요합니다.

2005년 9월에도 '김정힐'이라는 닉네임까지 붙었던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 등 미국의 국무부 라인은 한국 정부에 협조적이었지만 제재의 칼을 쥐고 있는 재무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전 세계 기업과 금융기관이 저승사자라 부르는 그들입니다.

북한의 호응도 변수입니다.

2년 전과 달리 지금은 남측과의 협력에 매우 냉담합니다.

게다가 정부가 추진하려는 '개별관광'이 얼마나 북한에 매력적인 사업인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어느덧 문재인 정부도 반환점을 돌아 임기 후반부를 향합니다.

대북정책 마이웨이 선언이 어떤 결과를 끌어낼지 앞으로 지켜봐야 합니다.

한미동맹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시간에 쫓기는 정부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결국 이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내공에 달려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사람 문제를 얘기 안할 수 없습니다.

내밀한 소식통에 의하면 지난 연말 청와대 고위층 안보 인사 일부가 사의를 표했는데, 문 대통령이 이를 반려했다고 합니다.

그때 나온 얘기가 "지금 사람 바꾸고 할 때가 아니다.

일을 해야 한다"였습니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 진용이 'BDA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손에 잡히는 결실을 이뤄낼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일입니다.

(이글은 프리미엄 북한뉴스레터 '한반도&' 에디터 칼럼(1월21일)입니다.

구독을 원하시면 '이메일 신청'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53679 해주세요)


/연합뉴스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