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DJ, 23일·13일 단식…최근엔 손학규·이정미 9일 단식
황교안 단식으로 본 野대표 단식의 역사…'최종 승부수'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20일 정부의 국정 대전환을 촉구하며 단식 투쟁에 돌입하면서 정치권 '단식의 역사'에도 관심이 쏠린다.

황 대표는 당내 쇄신 요구가 빗발치는 상황에서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 저지,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연장 등 산적한 현안까지 단번에 돌파하기 위해 단식 투쟁을 타개책으로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단식 투쟁은 세간의 이목을 끌어 단시간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한다는 면에서 정치인들이 중요한 순간에 꺼내드는 '최종 승부수'로 자주 활용돼왔다.

다만 과거 단식 투쟁이 효과를 거둔 적도 있지만 '무위'에 그친 적도 많았다는 점에서 황 대표의 단식이 정부의 정책 전환을 유도하고 제1야당 대표로서 존재감을 각인시킬 수 있을지, 아니면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될지 주목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오래됐으면서도 자주 언급되는 '원조' 단식 투쟁은 1983년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식이다.

당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가택연금 상태였던 김 전 대통령은 5월 18일 학생·종교인·지식인의 석방과 복학·복직, 언론 통폐합 백지화, 대통령 직선제 회복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했다.

주변의 만류와 입원에도 단식은 23일간 이어졌고 김 전 대통령은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나의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라며 단식을 마쳤다.

김 전 대통령의 단식은 결국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가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고 이들은 이듬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고 이를 토대로 신한민주당을 창당, 1985년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황교안 단식으로 본 野대표 단식의 역사…'최종 승부수'
1990년에는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방자치제 실시와 개각제 개헌 포기 등을 요구하며 13일간 단식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구는 1991년 지방의회 선거로 일부 실현됐고 1995년에는 자치단체장 선거가 실시되며 그 뜻이 달성됐다.

90년대 이전의 단식이 민주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문민정부 출범으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의 단식은 특정 정책에 대한 요구나 반대, 이익 추구 등의 수단으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11월에는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열흘간 단식으로 노무현 측근 비리 수사를 위한 특검 도입을 관철했다.

2007년에는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해 26일간 단식했으나 '무위'에 그쳤다.

작년 5월에는 자유한국당 김성태 당시 원내대표가 드루킹 특검 도입을 위해 9일간 단식, 뜻을 이뤘다.

작년 12월에는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 정의당 이정미 당시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가 여야 5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합의하자 9일 만에 단식을 마쳤다.
황교안 단식으로 본 野대표 단식의 역사…'최종 승부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