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하노이 미·북 2차 정상회담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 이렇게 말했다. “그(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 자신의 ‘핵담판 파트너’를 동정하는 듯한 발언이다. 결렬로 끝난 하노이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과 북한 핵심 참모들의 진면목, 다시 말해 그들의 역량을 간파했다. 미국은 상대방의 패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다. 북한은 정보력은 물론이고, 협상의 기술에서도 시쳇말로 게임이 안됐다.

북한은 지금까지도 단계적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자신들의 ‘핵·미사일 보따리’를 한꺼번에 풀지 않고 하나씩 내놓겠다는 것이다. 그때마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게 ‘김정은의 계산법’이다. 이 같은 협상 전략은 상대방이 보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를 모른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궁금하면, 대가를 지불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보따리 안의 물건’들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9일(현지시간)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북한엔 5개의 핵시설이 있다”며 “김정은 위원장은 그중 1~2개만 없애길 원하길래 내가 ‘다른 3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고 공개했다. 북한이 선심쓰듯 첫번째 폐기 카드로 내놓은 영변 말고도 다른 핵시설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중앙일보가 미 정가의 외교소식통들을 인용해 보도한 것에 따르면, 하노이 회담에서 미국은 ‘트리튬 폐기’ 여부를 묻는 기습 질문으로 북한 협상단을 당혹케했다고 한다. 수소 폭탄 제조시설까지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미국은 하노이 회담 시작 전 실무회담을 할 때부터 이미 ‘회담 결렬’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북한 전문가는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한·미 워킹그룹의 실무자들과 함께 하노이 회담 직전에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다”며 “그 때 미국측은 김정은이 WMD(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실무회담에 나온 김혁철 북한 대미특별대표는 회담장에서 ‘핵에 대해선 공란으로 남겨두자’는 말을 반복했다.

중국의 관전평도 비슷하다. 한 중국측 인사는 “하노이 회담 결렬과 관련해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에서 성과를 낼 의지가 없었다고 본다”며 “아울러 북한의 협상력이 부족했다”고 평했다. “지나치게 조바심을 드러낸 것이 회담 결렬로 이어졌을 것”이란 추론도 덧붙였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협상이 결렬 직전에 이르자, “영변핵시설이 북한 핵전력의 70%”라고 강변했다. 영변을 영구 폐기할테니 선물을 달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영변 카드’를 문재인 대통령과의 2018년 9월 평양선언에서 이미 사용한 바 있다. 이미 보여준 카드를, 자신이 갖고 있는 패의 ‘에이스’라고 우긴 격이다. 김정은과 북한 참모진의 ‘아마추어리즘’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이다.

김정은은 ‘하노이 결렬’ 후 협상을 이끌었던 인물들에 책임을 돌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은 겸직하던 통일전선부장직을 내놨다. 군부 실세라는 점을 감안해 숙청까지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한동안 김영철이 전면에 나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탈북자 단체에선 한달 여 전부터 ‘김혁철이 총살당했다’는 루머까지 나올 정도다. 노동신문에선 최근 들어 ‘반혁명’, ‘숙청’ 등의 말들이 등장했다. 청와대가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도 이 점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북 핵협상장에 나올 만한 인물들이 사라지고 있어 협상 재개가 미뤄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중재자 혹은 촉진자를 자처한 우리 정부로선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 지금껏 드러난 정황에 근거해보면, 미국이 우리 정부와의 정보 공유에서도 선을 긋고 있다는 게 점점 명확해지고 있다. 북한의 속내를 정확히 전달할 처지도 못된다. 외교·안보 분야의 ‘아마추어리즘’에 관한 한 우리도 자유롭지 못하다.

박동휘 정치부 기자 donghuip@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