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하노이' 노선 '자력갱생' 천명…제재 장기전 대비
시정연설로 하노이 회담 결렬 원인 주민에 공개하며 내부 결속
北, '대화 시한' 두고 美 태도전환 압박…북한판 '전략적 인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대화의 문을 열어두되 미국의 태도 전환을 촉구하고, 내부적으론 장기전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북한판 '전략적 인내'가 본격화하는 모양새다.

김정은 위원장은 12일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에서 처음으로 육성으로 시정연설을 하고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에 대한 입장과 향후 정상회담 등 북미 협상 전반에 대한 정책 방향을 전례 없이 소상히 밝혔다.

그는 지난 2월 하노이에서 열렸던 2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이 진정으로 조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이 있기는 있는가 하는 데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한 계기"라며 "미국은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회담장에 찾아왔다"고 평가했다.

미국이 제시한 '일괄타결식 빅딜'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북미대화에 대한 회의적인 입장을 숨기지 않은 셈이다.

특히 미국 주도로 이뤄지는 대북제재에 대해 "미국이 우리 국가의 근본이익에 배치되는 요구를 그 무슨 제재해제의 조건으로 내들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와 미국과의 대치는 어차피 장기성을 띠게 되어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재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고도 말했다.

경제발전과 이를 위한 환경 마련에 필요한 제재해제를 얻기 위해 영변 핵시설 폐기라는 카드까지 내놓았지만, 미국의 퇴짜를 맞은 상황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김 위원장은 "우리도 물론 대화와 협상을 통한 문제해결을 중시하지만, 일방적으로 자기의 요구만을 들이 먹이려고 하는 미국식 대화법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흥미도 없다"며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만 대화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북한이 먼저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결국 북한은 트럼프 행정부가 핵 문제 해결에 대한 방법론을 바꿔야 회담에 응할 것을 밝히면서 당분간 기다리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김 위원장이 미국과 대화의 문은 열어두면서도 시한을 올해 연말로 못 박은 것도 이런 연장선에서 해석된다.

그는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우리로서도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며 "어쨌든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로 가면서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위한 분위기에 들어가는 상황에서 재선을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이 먼저 움직여야 호응할 것이라는 압박을 가하는 모양새다.

사실 '김정은 권력'은 영원하지만, 미국은 선거하는 과정을 거쳐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만큼 '시간은 내 편'이라는 판단 속에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압박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 오바마 정부가 북한에 대해 무시전략을 추구하며 북한 정권이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전략적 인내정책'의 북한판인 셈이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나와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처럼 적대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생각나면 아무 때든 서로 안부를 묻는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밝혀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을 분리해 평가하고 대응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北, '대화 시한' 두고 美 태도전환 압박…북한판 '전략적 인내'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강경한 주문을 하면서 회담 판이 엎어진 것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대화의 동력을 채우고 합의를 만들겠다는 속내도 읽힌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김정은 위원장의 시정연설은 북미 협상의 판을 깨지는 않겠다는 것이지만, 미국의 안을 받을 수 없는 만큼 제재 해제에 목메지 않겠다는 뜻"이라며 "시한을 올해까지 잡아 당분간 더 버틸 수 있다는 것이지만, 제재 때문에 쫓기는 것처럼 보이면 협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오늘의 정치정세 흐름은 우리 국가로 하여금 자립, 자력의 기치를 더 높이 추켜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자력갱생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앞서 지난 10일 열린 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에서는 자력갱생에 의한 경제발전을 '포스트 하노이' 노선으로 제시했다.

집권 이후 내내 자력갱생의 경제노선을 유지해온 김정은 위원장이 제재 완화에 대한 기대로 북미 협상에 나섰지만, 물거품이 돼버리면서 다시 자력갱생으로 현상 유지하는 정책 노선을 선택한 셈이다.

내부 자원과 인력을 총동원한 자력갱생을 앞세우다 보니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국가 경제에 대한 "통일적 장악과 통제, 전략적인 작전과 지휘"를 강조, 자율권을 앞세웠던 종전에 비교해 후퇴한 듯 느낌마저 들었다.

김 위원장은 또 자력으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한 과업을 제시하며 "대외경제협조와 기술교류, 무역활동을 다각적으로, 주동적으로 책략있게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속에서도 이런 언급을 한 것은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중국과 러시아 등 주요 무역국 외에도 라오스 등 제재의 틈을 비집고 다양한 국가와 경제교류에 나서는 최근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연장선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내부 기강 확립, 특히 간부와 기득권이 경제난 해소와 주민 생활 향상은 안중에 없이 관료주의와 부정부패행위를 하는 데 대해 용납하지 않겠다는 점을 직접 천명했다.

간부와 기득권의 부정부패에 환멸을 느끼는 주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는 발언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 내내 오로지 인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며 주민들의 지지를 기대하기도 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 이후 처음 시정연설을 통해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한 입장과 향후 북미 협상에 대해 소상히 밝힌 것은 내부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사실을 더는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그 책임을 미국의 '북한 체제 전복에 대한 야망'으로 돌리면서 내부 결속을 촉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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