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정상회담과 北최고인민회의 계기에 북미 입장 중대 변화 없어
美, 3차 북미회담 여지 北, '새로운 길' 거론안해…"협상판 깨지 않겠다는 것"
전문가들 "文 대통령 부담 커져…'이익의 조화점' 찾아내야"
입장차 속 대화 문 열어둔 南北美정상…한반도 정세 어디로
11일 나란히 열린 한미정상회담과 북한 최고인민회의 및 관련 회의는 한반도 정세에 명암을 동시에 드리웠다는 평가가 나온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2월 27∼28일·하노이) 결렬 후 40여일 만에 이뤄진 남북미 정상의 '간접대화'라는 점에서 관심을 끈 두 이벤트에서 비핵화와 상응조치를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기본 입장은 하노이 회담장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어느 쪽도 대화의 문을 닫으려 하지 않은 가운데, 남북대화를 통한 돌파구 마련이 시도되게 됐다는 점은 기대를 모은다.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다양한 스몰딜이 이뤄질 수 있지만 현시점에서 우리는 빅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빅딜은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라며 기존 빅딜 선호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와 더불어 북한이 강하게 요구하는 대북 제재 해제와 관련해서는 "제재가 계속 유지되길 원한다"는 기본 입장을 재차 밝혔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의 대북 메시지가 그 액면만 봐서는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불러들이는데 충분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북한 최고인민회의와 그에 앞선 노동당 전원회의 등에서 나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국정 화두는 '자력갱생을 통한 제재 돌파'로 요약된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일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오판하는 적대세력들에 심각한 타격을 줘야 한다"며 "자력갱생의 기치 높이 사회주의 건설을 더욱 줄기차게 전진시켜 나가야 한다"고 발언했다.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제시하며 요구한 '민생경제 관련 유엔 제재 해제'에 미국이 호응하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양보할 수도 없고, 핵무력 증강을 향해 역진할 수도 없는 김 위원장의 '딜레마'가 '자력갱생' 구호를 통해 표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제재 해제를 통해 경제건설의 속도전을 이룬다는 당초 목표가 하노이에서 좌절된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과의 장기전을 염두에 두고 내부를 정비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최고인민회의를 전후로 공개된 김 위원장의 발언을 봐서는 협상을 깨려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이 제재로 자신들을 옥죄려 하니 이 협상이 장기적으로 갈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미 모두 대화의 문은 열어뒀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청와대가 공개한 한미정상회담 언론 발표문에 따르면 한미 정상은 '톱다운 방식'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필수적이라는 데 대해 인식을 같이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대화의 문이 항상 열려 있다고 강조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세 번째 회담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단계를 거쳐(step by step) 열릴 수 있다고 답했으며, 남·북·미 회담도 계획에 있느냐는 질문에는 북한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점을 전제로 "역시 열릴 수 있다"고 답했다.

북한 쪽에서도 직접적인 대화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일각에서 우려하던 '새로운 길'카드를 꺼내들지 않았다는 점은 대화의 여지를 남겨둔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첫 대의원회의를 앞두고 소집한 정치국 확대회의, 노동당 전원회의 등에서 '자력갱생'을 강조하며 경제건설 총력집중을 강조했을 뿐 미국을 향한 비난조의 격한 메시지는 내놓지 않았다.

대화의 판을 깨지 않으려는 태도가 역력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북미 모두 쉽게 상대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대화의 흐름을 이어갈 필요가 있다는 데는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북한 문제를 외교성과로 유지할 필요가 있고, 김 위원장도 작년부터 걸어온 길을 돌이키기엔 위험부담이 크다는 인식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당분간 미국은 미국대로 대북 제재 망을 유지하고, 북한은 북한대로 러시아, 중국 등 우방국들과의 관계를 다져 나가며 '자력갱생'의 길을 가려 할 것이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한반도 정세의 극적인 변화보다는 '현상유지'의 요인이 현재로선 더 커 보인다.

이런 분위기 속에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미대화 재개의 발판을 만드는 '촉진자' 역할을 다시 떠맡게 됐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조만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남북정상회담 또는 남북접촉을 통해 북한의 입장을 가능한 한 조속히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한국이 생각하는 나름의 비핵화 로드맵을 제시했을 테고,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일정 부분 동의했다면 문 대통령은 그것을 바탕으로 김 위원장을 설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상회담 시작 전 '북한이 비핵화에 관한 완전한 로드맵을 제안한다면 북한에 대한 제재 해제·완화조치를 논의할 계획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논의할 것이다.

분명 오늘 회담에서 중요한 의제가 될 것이다"라고 답했는데 이 부분이 북한에 보낸 메시지의 핵심을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이 제안한 '스몰 딜'을 받을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현시점에서 우리는 빅딜, 즉 핵무기 폐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면서도 "그 딜이 어떤 것인지 봐야 한다.

다양한 스몰 딜 들이 이뤄질 수 있다"고 여지를 둔 점도 문 대통령 중재와 관련해 주목되는 대목이었다.

북한은 단계별 동시 행동으로 미국과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것이고, 미국은 북한과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일괄타결로 진정성을 확인하고 그다음에 단계별로 이행하자는 것이니 이 부분에서 접점을 찾는 것이 문 대통령의 주된 역할이 될 전망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올 오어 나싱(all or nothing')으로는 협상이 이뤄질 수 없다"며 "문 대통령이 수석협상가로서 역할을 잘 해서 남·북·미 간 아주 좋은 이익의 조화점을 찾아내는 게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물론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는 문 대통령의 의지를 북한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남북정상회담 직후 기자들과 만나 "남북정상회담 장소·시기 등은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박원곤 한동대 교수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 미국이 융통성 있는 입장을 문 대통령에게 밝혔느냐가 남북정상회담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그런 카드가 없다면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에선 문 대통령을 만날 이유가 없고 오히려 미국과 직접 대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입장차 속 대화 문 열어둔 南北美정상…한반도 정세 어디로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