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홍재택·의병장 정대억·여성 장성심·문학인 조명희 등
3·1운동 100주년 독립유공자 333명 포상…의병·농민 포함
국가보훈처는 26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333명을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6명(애국장 8·애족장 18), 건국포장 10명, 대통령표창 297명 등이다.

이 가운데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75명이 포함됐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유족에게 각각 수여된다.

중앙기념식장에서 포상을 받는 독립유공자는 1908년 강원도 영월에서 정해창 의진에 소속돼 의병 모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징역 2년을 받은 김현습(건국훈장 애족장) 선생과 1936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부인회 간부로, 각종 기념일에 임시정부 의뢰를 받고 기념 전단 인쇄와 배포 등의 활동을 한 안혜순(건국포장) 선생이다.

각각 손·자녀에게 전수된다.

올해는 여성과 학생, 의병과 국내외 항일운동, 평범한 농민 등 다양한 분야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등 관련 기관과 협업을 통해 공적을 발굴해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의와 검증 등을 거쳐 포상자를 확정했다.

포상자 중에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태형을 받은 농민 홍재택 선생이 포함됐다.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는 홍 선생은 평범한 농민으로 50세 때인 1919년 3월 중순경 경기도 용인 수지면에서 마을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태형 90대에 처했다.

10년 전에 후손이 포상을 신청했으나 공적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어 포상이 보류됐다.

이에 경기동부보훈지청이 용인시 수지구청의 협조를 받아 제출한 '범죄인명부'에서 독립운동 사실이 확인되어 포상된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당시의 3·1운동이 연령을 초월해 전 계층이 참여한 거족적인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용인 수지면에서는 선생 외에도 윤만쇠, 이달순, 강춘석, 권병선, 김영석, 정원규, 이희대, 천산옥, 진암회, 김원배, 김현주, 남정찬, 최충신, 이도해 선생 등 14명에게 동일한 공적으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바 있다.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 중 체포돼 순국한 의병장 정대억 선생도 훈장을 받는다.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를 무대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체포되어 순국한 정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1872년 11월 6일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5년 원주에서 원용팔 의진의 참모종사로 활동하고 1908년 같은 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했다.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의사삼계원공을사창의유적(義士三戒元公乙巳倡義遺蹟)'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사실과 의병 관련 탄압 기록인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확인됐다.

보훈처은 "37세의 나이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의병항쟁이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중형을 받은 조준묵 선생도 포함됐다.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는 선생은 1921년 3월 평안남도 대동군 시족면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의 교통원으로 일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징역 7년의 중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독립청년단은 5천여 원에 달하는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매일신보'와 '동아일보', '조선독립운동' 등의 자료를 통해 공적이 확인됐다.
3·1운동 100주년 독립유공자 333명 포상…의병·농민 포함
또 중국과 국내를 넘나들며 독립운동에 참여한 여성 독립운동가 장성심 선생에게는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1906년 황해도 봉산에 태어난 선생은 1920년 4월 봉산에서 사립 왕성학교 교사로 재직 중 여자청년회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1921년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1924년 5월 흥사단에 입단, 이듬해 상하이에서 활동하다 귀국했다.

이후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수양동우회 평양반우회 위원, 평양여자소비조합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다 1938년 10월 황해도 봉산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중국 상하이로 다시 건너가 1940년까지 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했다.

뛰어난 항일문학 창작으로 독립의식을 일깨운 조명희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1894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본에 유학, 1921년 12월 도쿄에서 친일파를 응징할 목적으로 조직된 의권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귀국 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에 참여해 활동했고, 1928년 8월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민족신문 '선봉'의 주필을 맡았다.

소비에트 문사동맹 원동관리부 조선인 지도원 등으로 활동하며 시와 소설 창작 등 활발한 문필활동을 펼쳤다.

1920년대부터 1938년 사망 직전까지 국내와 러시아에서 '낙동강', '짓밟힌 고려'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해 항일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1937년 9월 거주지 하바롭스크에서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소련 비밀경찰에 체포돼 이듬해 5월 총살됐다.

보훈처는 "선생은 문학을 무기로 조국독립을 위해 투쟁했을 뿐 아니라 문학사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3·1운동 100주년 독립유공자 333명 포상…의병·농민 포함
만주 북간도에서 3·1운동에 참여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진영의 개혁과 단결을 위해 노력한 이한호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1895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인 선생은 1922년 1월 상하이에서 이동휘가 이끄는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같은 해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국민대표회주비회의 독립방안 청취를 위한 연설회의 개최를 발기하고 8월 국민대표회 소집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다.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북간도 독립운동 단체인 맹호단 단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과 독립운동 최고기관 창설을 역설했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학업에 몰두했고,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복 후 초대 서독 총영사를 거쳐 경제사절단장으로 활약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