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자카르타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현지에 진출한 은행들은 “신남방이면 뭐든 된다”며 일감을 찾느라 분주해 보였다. 성과 제출용 ‘아이디어 급구’는 기업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인도네시아의 한국계 A은행 관계자는 “한 대기업 계열 건설사가 2년 전 쯤 위험이 커 대출 승인이 안 난 프로젝트를 이번엔 본사 보증을 받아 들고 왔더라”고 했다. 두 사례의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은행은 대출을 승인했을 것이다. 물론, 위험은 서울의 본사가 지는 구조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국정 과제는 늘상 이런 식이다. 정권의 명멸을 지켜본 기업인들은 으레 그랬다는 듯, 현 청와대의 임기 안에 ‘진상’할 성과 목록을 만들어내느라 바쁘다. 문 정부는 2020년까지 아세안에서 무역액 2000억달러, 2030년 500억달러를 달성하겠다고 목표를 내걸었다. 올해 교역액이 1600억달러이니 우리 기업의 아세안 진출 속도를 감안하면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지 않다는 게 청와대의 기대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목표지향형 정책 추진은 무리수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것도 없다. 현 정부가 이잡듯 뒤지고 있는 이명박 정부 시절 해외 자원개발이 그랬다.

무역액의 내용도 좀 더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아세안 10개국 대부분은 한국과의 교역관계에서 무역역조 현상을 겪고 있다. 수입이 수출보다 훨씬 많다는 얘기다. 인도네시아 정부만해도 올 하반기에 잇따라 수입규제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인도네시아의 이익이 보장되는 통상 관계만을 이어갈 계획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김영채 주아세안대표부 대사(자카르타)는 “한국은 아세안으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얻고 있다”고 했다. 한-아세안과의 교역관계에서 손익계산서를 달리 써야한다는 얘기다. 중·단기적으로는 한국이 그동안 누려왔던 이익을 줄이되, 장기적인 이익을 얻는 방향으로 정책설계를 해야한다는 게 아세안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일본이 전쟁배상금을 기회로 아세안을 경제 식민지로 삼으려다, ‘경제적 동물’이란 비판을 받고 새로운 아세안 정책을 선언한 게 1977년 ‘후쿠다 독트린’이다. 당시 일본은 아세안을 향해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고 공언했다.

신남방정책 발표 1년이 넘은 현 시점에서 추동력 문제도 한번쯤 되짚어봐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신남방정책은 정치·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총합이 이뤄져야 그나마 희망을 엿볼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다. 각 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성과와 과제를 종합해 시간표별로 세부적인 정책 목표를 만들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주체인 관료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다른 소리가 들린다. 신남방정책위원회에 배속되는 걸 꺼려하는 분위기다.

신남방정책은 역대 어느 정부도 걸어보지 못한 대외 정책의 중대한 전환이다. 미국, 유럽, 일본, 중국 등 4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외교적 우군을 만든다는 점에서 반드시 성공해야 할 과제다.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한다. 청와대만의 낙관만으론 ‘패러다임’ 전환을 이룰 수 없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