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25일 만에 열린 후속 고위급 회담에서 양측이 정면충돌했다. 북한은 ‘한반도 전쟁 리스크’까지 거론했다. 미국이 요구한 핵 시설 신고나 비핵화 일정표에 대해서도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이 같은 북한의 태도에 대해 ‘압박을 통해 요구를 챙기려는 전형적인 협상술’이라는 해석과 ‘북한이 비핵화에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는 분석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설전 거듭한 미·북 첫 고위급 회담

지난 6~7일 평양에서 열린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회담은 파국으로 끝났다. 회담이 끝난 뒤 양국의 평가부터 극명하게 엇갈렸다.

폼페이오 장관은 회담 직후 “회담은 매우 생산적이었다. 핵심 이슈에 대해 진전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 외무성은 “미국이 종전(終戰)선언은 이런저런 구실을 대고 뒤로 미루면서 강도처럼 비핵화만 요구했다”며 “이런 자세는 불신과 전쟁 리스크만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폼페이오 장관은 곧바로 “우리의 비핵화 요구가 강도 같다면 전 세계가 강도”라고 맞받아쳤다.

미국은 당초 고위급 회담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8월 말까지 핵시설 신고서와 비핵화 일정표를 받을 계획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9월 유엔총회를 전후해 종전선언과 김정은의 백악관 방문을 추진하는 등 한반도 비핵화 이슈를 11월 중간선거 때까지 끌고간다는 전략을 세웠다는 관측도 나왔다. 그러나 이번 회담으로 중대한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

◆“장기전으로 가는 비핵화 협상”

‘차질 조짐’은 회담 전부터 나타났다. 지난달 19일 북·중 3차 정상회담이 있은 뒤 북한은 미·북 후속 고위급 회담에 ‘뜸’을 들였다. 그 사이 미국에선 북한의 핵시설 보강,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잠수함 건조 소식이 전해지면서 비핵화 회의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미 인터넷매체인 악시오스는 “폼페이오는 김정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 약속을 이끌어내서 ‘인내심 적은’ 트럼프 대통령을 만족시켜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을 갖고 북한에 갔다”고 보도했다. 에번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수석부차관보는 WP와의 인터뷰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의 게임 플랜과 의도를 지금 목도하고 있다”며 “북한 비핵화 회의론자의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2007년 미군 유해 송환협상을 벌였던 빌 리처드슨 전 뉴멕시코 주지사는 “북한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판돈을 올리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전형적인 북한식 협상술”이라고 해석했다. 북한이 ‘판’을 깨기보다는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약속을 받기 위해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는 “이번 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고 보도했다.

◆“유쾌하지 못한 옵션만 남아”

미 국가이익센터(CNI)의 해리 카지아니스 국방연구국장은 폭스뉴스 기고문에서 “이제 트럼프 행정부에는 세 가지 옵션만 남았고 하나같이 유쾌하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가 제시한 옵션은 △북한의 대량파괴무기를 없애기 위한 군사 공격 △북한 봉쇄 정책 또는 최대 압박 전술 구사 △북한에 대한 핵보유국 인정 후 중국 위협 대응이다.

한·미·일 외교장관들은 8일 도쿄에서 회담을 한 뒤 북한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CVID)’ 원칙을 재확인하고 그런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유지해 나간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맥이 빠진 합의라는 비판이 거세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