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러코스터의 북미협상 역사…싱가포르 담판, '천번 중 한번의 기회'

최선영 기자 특별취재단 =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미국과 관계 개선으로 경제부흥을 이루려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야심 찬 꿈'이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이뤄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

김일성 주석은 물론 김정일 국방위원장 시절에도 북한은 북미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제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이른바 북미 관계 정상화에 나선다.

우선 과거 북미협상에서 수차례 실패를 맛본 탓에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여전히 북한의 완전한 핵폐기 의지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면서 행동으로 증명하라며 김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형국이다.

물론 핵을 포기하지 않고는 "인민들에게 남부럽지 않은 유족하고 문명한 생활을 마련해주겠다"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김정은 위원장 스스로 잘 알고 있어 보인다.

김정은 위원장은 국가재건을 위해 '핵·경제병진노선'을 과감히 접고 '경제건설 총력집중'의 노선 대전환을 선택한 것으로 보이나, 조부와 부친이 걸어본 적이 없는 초행길을 가고 있다.

다시 말해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2천만 주민의 생사가 달린, 북한의 명운을 건 담판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전통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행동방식과 과단성을 가진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어서 가능한, 다시 없을 '기회'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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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캐나다 퀘벡주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향해 "북한을 위대하게 만들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단 한 번의 기회(one-time shot)"라고 말한 데서도 적극적인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지난 1일 홍콩 주재 한국 총영사관과 민주평통 홍콩지회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지금은 한반도의 대결 국면을 해소할 수 있는, 분단 73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한 바 있다.

역사를 거슬러보면 6·25 전쟁 이후 대립과 갈등의 역사를 반복해오던 북미 양국은 1990년대 들어 북핵문제를 둘러싸고 수차례 협상에 나섰지만, 불신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실패했다.

1993년 북한의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과 미국의 북한 핵시설 폭격 움직임으로 위기가 고조되면서 '1차 북핵위기'가 불거졌다.

하지만 당시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방북 등으로 북미대화 계기가 마련됐고, 양측은 1994년 10월 21일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미국 등의 경수로·중유 제공을 골자로 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제네바 합의)을 체결했다.

1998년 북한의 대포동 로켓 발사로 다시 위기에 치닫던 북미관계는 이듬해 미국이 북핵 해법으로 '페리 프로세스'에 이어 대북경제제재 완화 조치를 발표하고,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면서 해빙을 맞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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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빌 클린턴 미 대통령 임기 말기인 2000년에는 북미정상회담이 처음 추진됐다.

그 해 10월 9∼12일 조명록 당시 북한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로 미국을 방문해 적대관계 종식, 평화보장 체제 수립, 미 국무장관 방북 등을 골자로 하는 '북미 공동 코뮤니케'를 채택했다.

이를 전후해 클린턴 대통령의 연내 방북 방침도 공개됐다.

이어 10월 23∼25일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을 준비하기 위해 미 국무장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방북했다.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을 목전에 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동력을 잃은 방북 계획은 취소됐고, 북미정상회담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거기에 더해 부시 대통령은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국정연설에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고, 북한이 비밀리에 고농축우라늄(HEU)을 개발한 의혹이 불거지면서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며 제네바 합의는 사문화했다.

그러나 중국이 의장국을 맡는 다자협의체인 6자회담(2003년 8월 개시)에서 2차 북핵위기가 다뤄지면서 2005년 북한 핵문제 해결 로드맵을 담은 '9·19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데 이르렀다.

하지만 직후 북한 지도부의 비자금 창구로 알려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대한 미국 재무부의 금융 제재에 북한이 2006년 10월 첫 핵실험으로 대응하면서 또 한 번 긴장이 고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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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다시 북미 양자대화의 판이 차려졌고, 9·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 조치 내용을 담은 '2·13합의'(2007년)가 나왔다.

이에 따라 북한은 해외 언론이 중계하는 가운데 핵 개발의 상징인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하는 이벤트를 하고, 미국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면서 북핵 해결과 북미관계가 진전하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 북핵 검증방법을 둘러싸고 한미와 북한이 충돌하면서 9·19 공동성명 역시 사문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인 2012년 북미는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과 글린 데이비스 당시 대북정책 특별대표 간의 베이징 협의를 거쳐 북한의 핵동결·미사일 발사 유예와 미국의 대북 식량 지원을 골자로 하는 '2·29 합의'를 발표했다.

하지만 이 역시 불과 2개월도 안 돼 북한이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하면서 무효가 됐다.

롤러코스터처럼 반전을 거듭했던 북미 협상의 불행한 역사가 이번 싱가포르에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지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