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노골적인 우리 정부 길들이기가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행사 취재를 위한 우리 측 기자단 방북을 번복하고 남북한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하는 등 ‘횡포’가 잇따른 데 따른 비판이다. 정부의 굴욕적인 ‘저자세 협상’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북한은 23일 오전 판문점 연락채널을 통해 우리 측의 풍계리 취재진 명단을 접수했다. 지난 18일 정부가 보낸 명단을 계속 거부하다 닷새 만에 받아들였다. 전날 정부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 명의의 입장문에서 “북측의 후속 조치가 없어 기자단 방북이 이뤄지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유감을 밝혔다.

핵실험장 폐쇄를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서는 북측도 우리 측 취재가 절실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북에 끌려다닌 것 아니냐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북한이 우리 측만 떼어놓고 가기는 껄끄러웠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 역할이 매우 중요한 상황인데 우리를 빼놓고 하면 의미가 반감된다고 봤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국가정보원 라인 등 비공식 채널을 통해 북측 체면을 세워주는 선에서 물밑 협상을 벌였다는 분석도 제기했다. 통일부가 지난 22일 밤 공지를 통해 “북측이 수용한다면 남북 직항로를 이용해 23일 원산으로 이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점이 근거다.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도 “맥스선더 한·미 연합군사 훈련의 종료일인 25일 이후 남북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대화 재개가 이뤄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구체적인 내용은 밝힐 수 없지만 여러 가지 분석을 통해 문 대통령은 남북 간 교착 상태가 풀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같은 비공식 접촉이 향후 남북 협상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는 우려도 나왔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은 우리 정부를 통해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우리 정부를 원색적으로 비난했지만 공식 대응을 하지 않은 채 한마디도 못한 게 아쉽다는 지적이다.

일단 정부는 북한이 남북 고위급회담을 재개할 뜻을 밝힌다면 적극 나선다는 입장이다. ‘판문점 선언’에 합의한 지 한 달도 안 돼 경색 국면이 장기화한다면 남북 모두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핵화를 비롯해 이산가족 상봉, 남북 민간교류 등 핵심 의제가 테이블에 오르지 못한다면 ‘회담을 위한 회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지배적이다.

이미아 기자 mi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