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을 둘러싼 의혹을 정면돌파하기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임종석 비서실장 명의로 1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보낸 질의서에서 그런 속내가 엿보인다.

동료 국회의원에게 후원금을 ‘품앗이’하듯 나눠주고, 피감기관 돈으로 외유성 출장을 간 것, 후원금으로 보좌진에게 수백만원씩 퇴직금을 준 것이 위법인지 따져보겠다는 게 내용이다. 김 원장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을 ‘법의 잣대’에 올려보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민정수석실의 조사 결과와 마찬가지로 “적법하다”는 판정을 받아내겠다는 의지가 배어 있다. 정의당까지 가세한 야 4당의 김 원장 퇴진 요구를 수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읽힌다.

청와대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야당의 정치공세다. 금융개혁을 좌초시키기 위한 보수세력의 ‘음모’라는 시각이다. 실제 그러한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금융인들조차 고개를 젓는다.

“외국 기업 투자설명회에 가서 받은 시가 5만원짜리 기념품도 의무적으로 회사에 신고해야 한다. 오찬을 겸한 투자콘퍼런스에 나온 식사는 손도 대지 못한다. 김 원장이 피감기관 돈으로 간 출장을 공적인 업무라고 피해 간다면 앞으로 누가 금감원장의 말을 따르겠는가.” 익명을 요구한 금융회사 준법감시인의 얘기다. 어느 누구보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금감원장이 도덕성에 흠집이 난 만큼 적법 여부를 떠나 금감원장직을 수행할 동력을 상실했다는 의미다.

여론도 비슷하다. 이날 나온 여론조사(리얼미터)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한 주 전보다 1.9%포인트 하락한 66.2%로 나타났다. 20대의 지지율이 7.3%포인트나 빠졌다. 김 원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도 50.5%로 절반을 넘었다.

춘풍추상(春風秋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자신에게는 가을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청와대는 지난 10일 지난 정부의 적폐청산 결과를 각 부처에 내려보냈다면서 이 단어를 썼다. 각자의 지위에서 지난 정부의 전임자가 했던 일을 짚어보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공교롭게도 김기식 원장에 대한 각종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기였다.

금융수장의 가장 큰 자격 요건은 도덕성과 투명성이다. 금융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당국자의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영(令)을 세울 수 있다. 더구나 김 원장은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발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김 원장은 국회의원 시절 ‘저승사자’로 불리며 금융회사와 공공기관의 기강 해이와 세금 낭비를 질타했다. 한 공기업 임원은 “김 원장의 ‘노력’ 덕분에 영국 런던을 1박3일로 다녀와야 했다”며 “김 원장의 9박10일 유럽 출장에 낀 관광 일정을 보니 배신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비판적 지지 의견을 보였던 정의당도 이날 고심 끝에 김 원장의 사퇴 촉구를 결의했다. 지난 9일 당 논평에서 “김 원장이 뚜렷이 드러난 흠결을 안고 제대로 직무를 수행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제 결자해지의 시간이 오지 않았는가 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청와대는 그러나 이날까지 법의 잣대를 고집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한 질의 요청은 정의당 결정 직후 나왔다. 김 원장에 대한 야당의 고발사건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도 ‘면죄부’를 주기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냐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여당의 한 중진의원은 “김 원장이 국민의 신뢰를 잃으면 금융개혁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난감하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만신창이가 된 김 원장이 어떻게 금융개혁을 이뤄낼수 있겠는가에 대한 반문이다. 김 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 고공지지율에 취한 청와대가 국민의 눈높이를 외면하고 오만해졌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다.

“우리 정부가 정의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만큼 작은 도덕적 흠결조차 정부에 대한 신뢰에 타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달 19일 정부 서울청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공직자들 앞에서 한 말이다.

이심기 정치부장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