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가상화폐거래소 폐쇄와 관련해 입장을 번복하면서 가상화폐 거래자들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시민들이 12일 서울 다동에 있는 한 가상화폐거래소 시세판을 보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정부가 가상화폐거래소 폐쇄와 관련해 입장을 번복하면서 가상화폐 거래자들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시민들이 12일 서울 다동에 있는 한 가상화폐거래소 시세판을 보고 있다. /신경훈 기자 khshin@hankyung.com
“가상화폐거래소 폐쇄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론을 중시하는 정부이기 때문에 이러다 세금 부과하는 선에서 마무리할 것 같아요.”

12일 가상화폐 관련 인터넷 동호회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정부 규제로 손해를 입을 가능성을 걱정하는 글도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강력한 규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계속 투자하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정부가 가상화폐거래소 폐쇄 등 강력한 규제 가능성을 내비쳤다가 한발 물러서면서 여론에 따라 정책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설익은 정책' 던져놓고 여론 눈치… 반대 댓글 쏟아지자 '뒤집기'
◆정치세력화한 거래자들

가상화폐 거래자들이 정부 정책 방향을 좌우하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활발한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과 모바일메신저 활동으로 각종 거래 정보를 주고받고, 거래에 불리한 정부 정책과 관련해선 강한 결집력을 보이며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이날 올라온 ‘암호화폐 투자자는 문재인 대통령을 만든 핵심 지지층인 국민들입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을 비롯해 1주일 새 약 4000건의 가상화폐 관련 청원이 올라왔다. 청와대 국민청원이 30일 이내에 20만 명의 동의를 얻으면 청와대가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

이날 한 거래자는 단체 카카오톡방에서 “혼란스럽고 어려운 고위험 시장이 먹을 게 많다”며 지속적인 투자를 독려했다. “신분 상승을 위한 100년 중 마지막 기회다. 벤츠 정도는 가볍게 몰고 다니자”는 거래자도 있었다.

◆‘행동하면 바뀐다’ 학습효과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전문가들은 기성세대에 대한 박탈감이 강한 행동력과 연대감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이 가상화폐 거래를 위한 가상계좌 발급을 무기한 보류한 것을 두고 가상화폐 커뮤니티에는 “이 은행의 상품을 해지하고, 카드도 해지하자”는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불황과 취업난으로 삶의 계획을 세우기도 힘든 20~30대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며 “그런데 자기들이 지지해서 뽑은 대통령이 규제책을 갖고 나오니 이에 대한 배반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촛불 학습효과’도 있다는 분석이다.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는 “지난해 촛불집회로 정권이 바뀐 뒤부터 정부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행동을 취하면 먹혀든다는 학습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며 “가상화폐 거래자들도 행동하면 원하는 효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한 가상화폐 커뮤니티에는 “지방선거 때 심판합시다. 무능한 정부” “실검 순위에 ‘가상화폐 지방선거’ 어때요?” 등의 글이 연이어 올라왔다.

◆여론 기댄 청와대 독주 우려

여론을 정책 결정에 즉각 반영하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형태라는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계층의 의견만 과도하게 반영되고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는 배제된 포퓰리즘으로 흐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더구나 문 대통령의 국정 운영 지지율이 70%에 이르는 상황에서 정부가 지지층이 선호하는 정책에만 집중할 경우 사회 갈등이 더욱 심해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앞으로 정부가 주요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이익집단들이 청와대 청원 게시판 등을 활용해 집단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청원 게시판을 보고 정책을 결정할 것 같으면 국회도 필요 없고 사법부도 필요 없는 것 아니냐”며 “청와대의 독주가 심해지고 국회의 행정부 견제 기능이 약해져 민주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유승호/이현일/윤희은/성수영 기자 us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