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주재 러 대사 강조…美-北간 대화 중재하며 협상론 띄우기 나설 듯

러시아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1일 채택한 완화된 형태의 새 대북 재재 결의를 지지하면서 명분과 실리를 함께 챙긴 것으로 분석된다.

당초 미국이 제안했던 대북 원유 공급 전면 금지 등의 고강도 제재를 최종 결의에서 제외함으로써 '과도한 제재 불가'라는 기존 주장을 관철하면서 북한에 대한 유류 제품 수출 길을 계속 열어 놓은 동시에 제재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원칙도 함께 확인했기 때문이다.

바실리 네벤쟈 유엔 주재 러시아 대사는 대북 제재 결의 채택 뒤 안보리 연설에서 "우리는 핵보유국 지위를 노리는 북한의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중단을 요구하는 모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지지해 왔다"면서 "러시아는 끝없는 대북 압박과 대화 거부 노선의 무익함을 확신하면서도 핵실험에 단호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제재 결의 2375호를 지지했다"고 설명했다.

반복되는 대북 제재가 북한의 핵 개발 포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지만 북한의 핵실험을 용납할 수 없다는 단호한 의지를 천명하기 위해 제재 결의를 지지했다는 설명이었다.

러시아는 그동안에도 유사한 입장을 줄곧 밝혀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5일 중국 샤먼(廈門)에서 막을 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 뒤 기자회견에서 대북 제재 관련질문을 받고 "제재 체제는 이미 한계선에 도달했다.

전혀 효율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푸틴은 "그들(북한)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풀을 먹으면서도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해주기 위한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 측은 결의 최종안 마련을 위한 미국과의 물밑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의 초안대로 초강경 대북 제재안이 채택될 경우 북한의 추가 핵실험 또는 미사일 시험발사 시 안보리에 남은 수단이 뭐가 있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며 미국을 압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와 중국의 이 같은 압박에 미국도 애초의 강경 입장을 고수해 자칫 결의안 채택이 무산되는 것보다 제재 수위를 낮추더라도 북핵 문제에 단합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을 한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동안 북한 입장을 상당 정도 두둔해온 러시아는 또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기권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에도 명백한 신호를 줬다.

실제로 안보리 결의 채택에 앞서 제재 무용론을 주장해온 러시아가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기권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북한의 핵 개발은 용인할 수 없으며 북한 지도부도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압박 메시지를 던진 것이란 분석이다.

미국의 대북 초강경 태도를 상당 정도 누그러트리고 북한이 받을 고통을 크게 줄인 타협책인 완화된 대북 결의 채택을 성사시킨 러시아는 앞으로 중국과 함께 내놓은 한반도 문제 해결 '로드맵'(단계별 해결 구상) 이행을 촉구하며 대화 분위기 조성에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

네벤쟈 대사도 안보리 연설에서 러-중 로드맵을 상기시키며 "이 제안을 충분히 평가하지 않는 것은 중대한 실수가 될 것"이라면서 "제안은 안보리 테이블에 남아있고 우리는 그것의 검토를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당장 12일 이고리 모르굴로프 아태지역 담당 외무차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조셉 윤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만나 한반도 위기 해결 방안을 논의한다.

미국 측과의 대화 결과를 토대로 조만간 북한 측 고위인사를 러시아로 초청해 중재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유철종 특파원 cjyou@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