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조사받으며 '청와대 입장' 미국에 전달한 한민구
한민구 국방부 장관(사진)은 지난 3일 싱가포르에서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문건 하나를 전달했다.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에 관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한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몇 차례 사드와 관련해 말한 것을 종합 정리해 전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회담에서 미국 측과 논의한) 모든 의제에 대한 방향은 청와대와 조율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와 사전 논의한 만큼 상세한 설명을 할 수 있었지만 한 장관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매티스 장관과 만난 뒤 ‘문안의 구체적 내용과 의미가 뭐냐’는 기자들의 질문엔 “추가 설명할 입장이 아니다” “내용에 대해 내가 해석을 이리저리 말할 수는 없다”고 말을 아꼈다.

그가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건 그의 처지 때문이다. 한 장관은 사드 발사대 4기 보고 누락과 관련해 청와대 조사를 받고 있다. 심지어 지난달 31일 청와대로 불려가 민정수석실의 대면조사까지 받았다. 현직 장관이 민정수석실의 피조사자 신분이 된 점도, 그 사실을 공개한 것도 모두 이례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로부터 ‘문제가 있다’고 낙인 찍힌 현직 국방장관이 미 국방장관에게 청와대의 사드 의견을 전달하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청와대 조사받으며 '청와대 입장' 미국에 전달한 한민구
이를 두고 국방부 안팎에선 ‘문제가 있다면 문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을 교체하고 한 장관은 민간인 신분으로 청와대가 아니라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하지만 청와대는 4일까지 인사 검증 지연 등의 이유로 국방부 장·차관 후보자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주요 인선 작업이 거의 마무리된 청와대 국가안보실이나 외교부와는 대조적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청와대가 경질을 앞둔 한 장관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처음 열린 한·미 국방장관 회담에 보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에서 어색한 외교안보 행보를 하게 된 한 장관은 현지에서 계속 사드 보고 누락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는 시조 구절로 답을 대신했다. 조선 영조 때 시조집인 ‘청구영언’에 실린 시조를 인용해 ‘불필요한 외교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말을 아끼겠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야권에서도 청와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회 국방위원장인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은 이날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 처신이 너무 가볍다”고 지적했다. 정준길 자유한국당 대변인은 “청와대가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해 심각한 외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명길 국민의당 원내대변인도 “정부는 사드 문제를 키우지 말고 수습책을 내야 한다”고 촉구했다. 소통과 협치를 강조해온 문재인 정부의 향후 대응이 주목된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