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대통합·탕평인사를 외치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임기 말까지 원칙을 지키고 물러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청와대 정문 사이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이 보인다. 한경DB
역대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대통합·탕평인사를 외치며 청와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임기 말까지 원칙을 지키고 물러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청와대 정문 사이로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이 보인다. 한경DB
“앞으론 자주 못 뵐 것 같은데, 건강하십시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제15대 대통령 취임식을 하루 앞둔 1998년 2월24일 저녁. 설훈 최재승 등 새정치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들이 DJ의 일산 자택을 찾아 절을 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들은 DJ의 야당 총재 시절 비서를 맡았던 이른바 ‘동교동계 가신(家臣)’으로, 청와대로 들어가는 DJ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과 한화갑 김옥두 남궁진 윤철상 등 다른 가신들은 선거 운동 기간 중 ‘DJ 정권 불참’을 공개 선언했고 실제 DJ 집권 초기 청와대와 내각의 임명직 공무원을 맡지 않았다. DJ는 회고록에서 “그들(가신들)에게 한없이 고맙지만 그 고마움을 제때,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며 당시 심정을 밝혔다.
[한국 대통령의 리더십] 대탕평 외친 대통령들…2~3년 못 가 '측근·코드인사'로 실패 자초
대통령에게 인사만큼 중요한 업무는 없다. 취임 직후 장·차관급 약 120명, 1급 공무원 약 320명 등 450명가량의 고위공무원을 직접 임명한다. 행정부 국가 공무원, 헌법기관 공무원, 국가 산하단체 공무원 등 약 2만5000명에 대한 임면권도 갖는다.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대통합·탕평 인사는 대통령 국정 운영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인이다.

DJ 정권 초기는 역대 정권 중 탕평인사가 잘 구현된 시기 중 하나로 꼽힌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으로 국가가 대혼란에 빠져 있던 1997년 12월 당선된 DJ는 “민주화 동지는 있어도 가신은 없다”며 측근 배제 원칙을 천명하고 출신과 지역을 따지지 않는 탕평인사를 했다. 당선 직후 경북 출신으로 노태우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김중권 씨를 비서실장에 발탁했고 재정경제·정보통신·과학기술·건설교통부 장관 등 내각의 절반 정도는 연합정부를 구성한 자민련의 추천으로 구성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지 불과 나흘 만에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이끌어내 국민 대통합 메시지를 던졌다. 대선 과정에서 DJ 경쟁자인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밀었던 이헌재 씨도 금융감독위원장으로 기용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DJ는 집권 초기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며 외환위기 조기 극복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대통령들도 집권 기간 탕평인사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당선 직후 △대구·경북 사람이 아니고 △지방색채가 나지 않으며 △성격이 과하지 않고 △국정 경험을 가져야 한다는 ‘지침’을 만들어 비서실장 인사에 적용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대통합을 강조했다. 집권 2년차 17대 총선을 앞두고선 프랑스식 동거정부인 ‘이원집정부제’를 구체적으로 추진하기도 했다. 실권을 쥔 총리와 내각을 야당에 줘 권력을 분산시키면 정치의 오랜 갈등구조를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의 이런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지역주의 등에 기반한 편파, 당파, 보은, 회전문, 불통 인사는 물론이고 사조직을 국정에 개입시키는 ‘비선인사’까지 하면서 정권의 위기를 자초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특히 ‘가신 그룹’의 호가호위가 문제였다.

DJ만 해도 김중권 비서실장이 1999년 11월 물러나고 한광옥 비서실장이 들어서면서 탕평인사의 기조는 크게 후퇴했다. 이때부터 DJ는 청와대와 내각에 호남 출신 정치인과 관료의 활용을 늘렸다. 동교동계 가신들이 국정 운영의 주요 결정에 개입하고 당과 정부의 요직을 독점하자 2000년 말 집권당 내부에서 소장파 의원들이 권노갑 당시 최고위원의 사퇴를 공개 주장하는 이른바 ‘정풍운동’이 벌어지는 내홍까지 겪었다. 정권 말기엔 DJ의 세 아들이 모두 국정개입 의혹에 연루되면서 사법처리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6공의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씨를 국정운영에 관여하게 하면서 초기 탕평인사 원칙이 무너졌다. YS도 ‘소통령’이라 불리며 정권 초부터 국정에 깊숙이 개입해 각종 정책 결정을 ‘주물렀던’ 차남 김현철 씨가 1997년 구속되면서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문성이 떨어져도 자신이 추구하는 개혁에 동참하는 진보적 인사를 기용하는 이른바 ‘코드 인사’를 하다 임기 내내 야당과 충돌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학연·지연 등에 배경을 둔 인사로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 강부자(강남 땅부자), S라인(서울시 출신 관료) 같은 ‘인사 잡음’을 일으키면서 국민 신뢰를 잃어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 내내 ‘불통 인사’ 잡음이 끊이질 않더니 급기야 비선 실세 존재가 드러나 탄핵까지 당했다.

함성득 한국대통령학연구소장은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의 정치적 좌절은 대부분 인사 실패에서 비롯됐다”며 “차기 정부에서도 공평한 인사정책은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