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사드보복, 한국 산업의 갈 길 알려주다
“‘6일 전쟁’과 뒤이은 ‘욤 키프르 전쟁(제4차 중동전쟁)’, 여기에 ‘외환보유액의 급격한 감소’까지 겹치면서 전례 없는 군사적, 경제적 위협에 직면했던 이스라엘. 국내 정치적 갈등이 주춤거리자 이스라엘 국민은 농업국에서 첨단기술국으로의 과감한 전환을 지지하고 나섰다.”

왜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보다 더 혁신적인가. 마크 J 테일러는 외부 위협이 오히려 발전의 동력이 된 국가들에 주목한다. 그는 《혁신의 정치학》에서 답은 ‘정치’에 있다며 ‘창조적 불안정(creative insecurity)’이란 개념을 들고나온다. ‘외부 위협’이 ‘내부 갈등’보다 더 큰 국가에서는 ‘혁신율’이 더 높다(‘혁신 속도’가 더 빠르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는 주장이다. 테일러가 눈여겨 본 나라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다. 중국의 위협 속에서 성장한 대만, 북한 일본 중국 등으로 둘러싸인 긴장된 환경에서 발전해온 한국도 ‘창조적 불안정’을 지지하는 사례로 등장한다.

테일러의 프레임으로 보면 한국의 산업발전은 늘 외부 위협과 함께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만 해도 그렇다. 당시 북한의 위협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을까. 부품·소재 국산화 시동은 일본의 위협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고, 정권마다 찾아나서는 미래성장동력은 중국의 위협을 달고 다닌다. 동북아는 지금 한·중·일 3국이 모든 산업에서 경쟁하는 전면전의 장이나 다름없다. 이런 환경이 한국의 ‘혁신율’(또는 ‘혁신속도’)과 관련성이 있다는 가설은 그럴듯하다.

그렇다면 중국의 사드보복도 달리 생각해 볼 공간이 생긴다. 대중 수출이 지난 3년간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한 상황에서 사드보복이 한국에 얼마나 뼈아픈 사태인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 악조건에서도 올 들어 3월20일까지 대중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7% 증가했다. 주목할 것은 수출 증가를 주도한 품목들이다. 반도체(42.8%), 석유화학제품(53.9%), 평판디스플레이(3.9%), OLED(8.7%), 일반기계(10.6%), 석유제품(60.0%), 무선통신기기(9.9%), 철강제품(23.1%), 화장품(37.5%) 등이 눈길을 끈다. ‘중국이 아쉬워하는 첨단 부품·소재’, ‘중국에 앞서 고도화로 달려간 분야’, ‘중국인의 애국심도 어쩌지 못하는 소비재’ 등이 한국을 사드보복에서 구해내고 있다. 한국을 버티게 하는 힘은 외부 위협 속에서 쌓아온 그동안의 높은 혁신율이다.

문제는 제2, 제3 사드보복이 오지 말란 법도 없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외부 위협이 혁신의 동력이 되는 ‘창조적 불안정’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냐는 그래서 더욱 절실한 물음이다. 불행히도 한국 사회 곳곳에 적지 않은 적신호가 목격된다. 외부 위협이 더 이상 위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내부 갈등이 외부 위협을 압도해버리는 현상이 그것이다.

특히 요즘 같은 혁신 시대에는 경쟁국이 새로운 기술을 먼저 채택하는 것보다 더 큰 위협도 없다. 새로운 기술을 둘러싼 내부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해소 여부가 국가의 희비를 갈라놓는다. 중국 일본은 하는데 한국은 못 하거나, 중국 일본이 한국보다 한발 앞서가는 분야가 속출하고 있다.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4차 산업혁명을 떠드는 정치가 번번이 새로운 기술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의 손을 들어주는 탓이다. 정치가 내부 갈등에 굴복하는 순간 ‘창조적 불안정’은 멈추고 만다.

강대국 미국이 가상의 적을 만들면서까지 혁신 속도를 늦추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왜 어떤 국가는 다른 국가보다 더 혁신적인지, 그 답은 정치에 있다는 테일러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 한국 정치는 바뀔 수 있을까.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 박사 a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