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말레이시아 당사국 아니지만 유엔 안보리가 회부하면 재판 가능"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북한의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해 말레이시아 당국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ICC 고위급 지역협력 세미나 참석을 위해 방한한 실비아 페르난데스(Silvia Fernandez) ICC 소장은 4일 오후 대법원 청사 3층 회견실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한국에서의 일정이 마무리되면 말레이시아로 가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해 당국과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ICC 설립 근거 조약인 '로마규정'의 당사국이 아니기 때문에 김정남 암살사건은 ICC에 회부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ICC는 암살사건이 발생한 말레이시아와 협의해 사건 당사자들을 국제형사법정에 세우는 방안을 논의하기로 한 것이다.

페르난데스 소장은 "ICC에 사건을 회부하기 위해서는 범죄가 발생한 곳이 로마규정 당사국이거나 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국적이 로마규정 당사국이어야 한다"면서 "다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협정에 따라 사건을 ICC에 회부하면 김정남 암살사건의 범죄자들을 국제형사법정에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ICC는 로마규정의 당사국이 아닌 사건을 유엔 안보리가 회부해 재판을 진행하기도 했다.

페르난데스 소장은 "2005년 수단과 2011년 리비아에서 발생한 반인도범죄에 대해서 유엔 안보리가 사건을 회부해 ICC가 재판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앞서 두 사건처럼 김정남 암살사건이 ICC에 회부되면 김정남 살해 행위를 직접 수행한 두 여성 용의자들 뿐만 아니라 북한측 관련자들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이 실현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미국과 중국, 러시아가 로마규정의 당사국이 아니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해답을 내놓지 못해 한계를 드러냈다.

페르난데스 소장은 "당사국이 아닌 미국과 중국, 러시아는 ICC에 회부되지 않으면서도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 타국의 범죄를 ICC에 회부할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된다는 점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ICC는 사건이 발생해 회부되면 처리할 뿐,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범죄와 관련한 문제는) ICC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며 답변을 피했다.

일본의 전쟁범죄 책임에 대해서도 ICC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페르난데스 소장은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해 ICC가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냐"는 질문에 "ICC는 로마규정이 발효된 2002년 이후에 발생한 사건에만 관할권을 갖는다"며 "일본의 전쟁범죄는 ICC가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절대적이고, 유엔 안보리가 회부한다고 해도 사건을 맡을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아르헨티나 출신인 페르난데스 소장은 아르헨티나 외교부 법률국 법무담당관과 주 UN 아르헨티나대표부 법률자문관을 거쳐 아르헨티나 외교부 인권국장을 역임했다.

2010년부터 ICC 재판관으로 활동하다, 2015년 3월 송상현 전 ICC 소장 후임으로 선출됐다.

2018년 3월 퇴임할 예정이다.

ICC는 집단살해죄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형사처벌하기 위해 2002년 로마규정을 근거로 설립됐다.

범죄자의 해당국가가 재판을 거부하거나 재판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될 때 재판절차에 돌입한다.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hy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