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사무총장 10년 언행에서 '반기문정치' 편린을 찾았더니
마지막 총회개막 연설서 이례적으로 "나라 자원 훔치지 말라"등 지도자 계율 열거
기후변화 대책 제1 의제, 남녀 '50-50 지구' 추구, 대북 제재와 대화 병행 주장


"국민에게 봉사하라. 민주주의를 파괴하지 말라. 나라의 자원을 야금야금 빼먹지 말라. 비판한다고 투옥하거나 고문하지 말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외교협회(CFR) 초청 간담회에서 한국의 정국에 관해 언급한 '선정(good governance)의 완전 결핍'과 '리더십에 대한 국민신뢰의 배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지, 그에게 물으면 그는 마지막 유엔총회 개막 연설(9.20)의 이 대목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연설에선 잠언 같은 그의 '지도자 계율'은 이어진다.

"지도자들은 자신의 그 자리가 국민이 부여한 신뢰이지, 개인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맥상으론 국내 정치 상황을 겨냥한 게 아니다.

이 연설을 할 때 `비선 실세 최순실' 사태는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전이기도 했다.

그는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시리아, 우크라이나, 남수단 등의 지난 1년간 정세를 간략히 훑은 뒤 "실로, 세계의 너무나 많은 곳에서 지도자들이 헌법을 고치거나 선거 결과를 조작하거나 기타 방식으로 권좌에 매달리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며 세계의 실패한 지도자들을 정면 비판하는 과정에서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정치 지도자들과 후보들"을 가리키며 "국민을 분열시키고 공포를 더 해서 표를 더 얻을 수 있다는 냉소적이고 위험천만한 정치 수학에 빠지지 말라고"라고도 경고했다.

역시 문맥상으론, 무슬림을 표적으로 삼는 난민·이민 혐오증을 거론한 것이어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를 겨냥한 말이라고 외신들은 풀이했었다.

반 총장은 그러나 CFR 간담회와 같은 날 열린 유엔 출입기자단 기자회견에서 "나는 한국 국민이 현재의 위기 극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포용적 리더십을 간절하게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사회 통합과 화합'을 한국 사회의 과제로 제시함으로써 유엔 총회연설 내용을 그대로 한국에도 적용했다.

그가 앞으로 쓰게 될지도 모를 대선 출사표에 재활용할 만한 내용과 표현들이 그의 마지막 총회개막 연설 곳곳에 배치돼 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다.

일반적으로 유엔사무총장의 총회개막 연설은 그때까지 1년간의 분쟁국과 문제 지역들을 중심으로 국제정세를 개관하는 보고서 같은 것이어서 지루하고 재미없는 편이다.

그러나 반 총장의 마지막 연설은 그 앞서 9년 치 개막 연설들과 비교하면 튄다.

반 총장을 묘사할 때 "대체로 과묵한" 혹은 "때로는 흠결일 정도로 충돌 회피적인" 등의 수식어를 붙이는 서방 외신들도 반 총장의 이 연설에 대해 "세계 지도자들을 꾸짖다"는 등으로 논평하면서 그 신랄하고 직설적인 기조에 주목했었다.

유엔사무총장 10년 임기를 결산하는 연설인 만큼 다른 때와 다를 수 있다.

또 세계 각국의 정상과 정상급 대표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므로 지도자론을 펴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반 총장은 그러나 20일 한국 특파원단과 가진 기자회견에서 사실상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는 평을 들을 만큼 쟨 걸음을 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 유엔총회 개막 연설은 유엔사무총장으로서 과거 10년을 회고한 것일 수만은 없다.

총회에 참석한 세계 각국의 정상급 대표단 외에도 귀국 후 마주 대하게 될 한국 국민과 정치권이 이미 눈앞에 어른거렸을 수 있다.

그가 이 연설을 통해 '반기문 정치'의 일단을 보여줄 심산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말한 지도자 계율들은 그만의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를 부인하지 않는 모든 정치인, 실제로는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파괴하는 독재자마저 겉으로는 부인할 수 없는 일반적인 원칙이다.

지향하는 가치·정책 면이든 기교·기술 면이든 국내 현안과 관련한 '반기문 정치'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한국에선 외교관으로, 그 이후 지금까지 10년간은 국제정치 무대에서만 활동했기 때문이다.

다만 '반기문 정치'가 적어도 말로는 무엇을 추구할지는 그의 마지막 유엔총회 개막 연설에서 그 편린을 찾을 수 있다.

국내 정치에서 좌·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인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와 관련, 반 총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제5차 핵실험은 다시 한 번 역내 안보와 국제 안보를 위협했다"며 "그 한편으로 (북한) 국민의 고통과 곤경은 악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5차 핵실험은 개막 연설 10여 일 전인 9월 9일 실시됐다.

이어 그는 "DPRK 지도자들이 (핵 개발) 노선을 바꿔 자신들의 국민과 국제사회에 대한 책무를 다할 것을 촉구"했다.

반 총장은 2015년 연설에선 "한반도의 지속적인 긴장을 다룰 대화를 재개할 때"라며 "당사국들이 불신을 키울 어떤 행동도 자제할 것을 요청하며, 평화롭고 비핵화된 한반도를 향한 노력과 화해를 증진해나갈 것을 촉구"했다.

그는 특히 "나는 남북 간 협력을 지원할 태세가 돼 있다"며 "우리는 또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의 복지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 협력과 대북 인도적 지원 필요성을 말한 것이다.

실제로 그해 11월 '시기만 남았다'고 할 정도로 그의 방북 추진이 진척됐으나, 2016년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실험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지난 5월엔 방북을 재추진할 의사도 내비쳤으나 이미 동력이 많이 떨어진 데다 5차 핵실험으로 완전히 꺼지고 말았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북한의 비핵화 진정성을 의심하며 북한과 대화·협상에 소극적인 상황에서 반 총장의 전격적인 방북 추진은 그의 대선 도전 행보의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2012년 연설에선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언급에 이어 북한도 "한반도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간략히 짚고 넘어갔고,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첫 총회개막 연설을 한 2007년엔 그해 10월 2일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그리고 종국엔 평화 통일을 가져오는 역사적 순간이 되기를 충심으로 희망한다"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반 총장은 이외 다른 해 총회개막 연설들에선 북한 핵 문제나 한반도 정세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핵실험 때마다 "유엔 안보리 결의의 엄중한 위반"이라고 성토하고 안보리의 "더 강력한" 제재에도 찬성했지만, 한편으론 늘 "대화와 인내심 있는 외교"의 병행을 주장해 왔다.

지난 11월 30일 북한의 제5차 핵실험에 따른 안보리 제재 결의 회의에 참석한 그는 만장일치 채택을 환영하면서 "제재는 이행될 때에만 효과가 있다"고 적극적인 이행을 회원국들에 당부했다.

동시에 "제재는 지속적인 평화와 안보를 위한 종합적인 전략에 기반을 둬야 한다"며 이란 핵 협상 타결을 예로 들어 "외교적인 해결책은 의지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 회의에 참석하거나 발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역시 귀국을 앞두고 북한 핵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정리 기회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북핵과 관련, 국내 일각에서 일고 있는 핵무장론에 대해 반 총장은 부정적이다.

그는 2013년 연설에서 "핵 군축이 시들해지고 치명적인 무기들이 확산하고 있다"며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이 발효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비판했다.

2012년엔 더 안전한 세계 건설을 위해 "핵무기에서 자유로운 세계라는 우리의 목표를 추구"할 것을 촉구하는 등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핵 없는 세상' 노선을 적극 지지해왔다.

반 총장은 9월 15일 국회 대표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국내의 핵무장론에 대해 국제 규범을 내세워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10년 치 유엔총회 개막 연설에서 취임 첫해부터 한 번도 빼놓지 않은 제1의 의제는 기후변화다.

실제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파리협정은 그 스스로도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자랑하고 있고, 외신들도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에서 '기후변화 회의론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 파리협정을 발효시켰다며 그 공로를 그에게 돌리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미국 차기 행정부의 기후변화 정책과 그에 관련된 에너지산업 등 경제정책에 큰 변화가 예상되는 것처럼, 반 총장의 기후변화 의제는 그의 국내 경제정책과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기후변화 못지않게 그가 유엔사무총장으로서 강조해왔고 또 치적으로 내세우는 정책은 여성권리 보호와 여성 능력 개발이다.

그는 마지막 총회개막 연설에서 "나는 자랑스럽게 스스로를 여권주의자(feminist)라고 부른다"며 임기 초에 여성권리 보호와 능력 개발을 주 임무로 한 유엔 여성기구인 '유엔여성(UN Women)'을 만들고,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를 누린다는 의미의 '50-50 지구'를 추구해온 사실을 강조했다.

그는 "하늘의 절반을 여성이 떠받치고 있으며, 우리의 모든 목표를 이루는 데도 여성이 필수적"이라며 "이 세상에서 가장 활용되지 않는 게 여성의 잠재력"임을 줄곧 얘기해 왔다고 상기시켰다.

"나는 역대 어느 사무총장보다도 유엔 고위직에 여성들을 많이 임명했다"고 그는 자랑했다.

반 총장의 여성 정책은 유엔의 가치인 인종, 종교, 성지향성 등에 따른 차별 금지와 소수자 권리 보호의 일환이기도 하다.

그는 연설에서 "나는 사람들, 즉 인종, 종교 혹은 성지향성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의 자랑스러운 권리 수호자로 일해왔다"고 천명했다.

그가 내세우는 '50-50 지구' 목표는 정부, 기업 등의 고용, 인사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칠 의제이다.

특히 성 소수자 권리 보호의 경우 동성결혼 인정 문제까지 함축하고 있어 세계 곳곳에서 이른바 '문화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사안이다.

그는 유엔의 각종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에는 "시민 사회가 필수적"이라며 "시민 사회와 독립적 언론의 역할 증대에 대해선 '예스'라고, 집회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엔 '노'라고 나와 함께 외쳐달라"고도 말했다.

이외에도 그는 어린이, 빈곤층 등 취약계층에 대한 보호, 사형제 폐지, 난민 지원, 유엔 평화유지군 확대 등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그 후속타인 '지속가능개발목표(SDGs)'에 따른 각종 가치와 정책들을 자신의 임기 10년간 유엔총회 개막 연설 등을 통해 강조해왔다.

유엔의 특성상 이들 유엔의 가치와 정책은 국내 정치 지형상 오른쪽보다는 왼쪽으로 기운 게 많다.

반 총장이 귀국해 대선 도전 의사를 굳히고 정치적 둥지를 찾을 때 불과 수개월 전까지 유엔사무총장으로서 강조해온 가치와 정책들을 기준으로 한 선택이냐, 대선 후보가 되기 쉬운 "정치적 수학" 계산을 기반으로 한 선택이냐에 따라, 유권자들로부터 많은 질문을 받을 것이다.

반 총장에게 손을 내미는 정파들도 정치적 가치와 정치적 공학 어느 기준에 따른 것이냐는 질문을 감당해야 한다.

반 총장은 국내에서 '유엔사무총장은 세계의 수장'이라는 이미지 덕분에 단번에 대선주자 반열에 도약할 수 있었지만, 유엔사무총장으로서 지난 10년간 언행에 관한 기록은 앞으로 '반기문 정치'의 신뢰성이나 배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끊임없이 들춰질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yd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