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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가결] 2만명에서 232만명으로…'횃불이 된 촛불' 권력을 심판했다
결국 ‘촛불 민심’을 거스를 수 없었다. 국회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광화문 일대에서 1차 촛불 집회가 열린 지 42일 만이다. 새로운 ‘광장의 역사’가 쓰여졌다.

매주 토요일 광장을 밝힌 촛불 민심은 단호했다. 박 대통령이 세 차례나 국민 앞에 나와 머리를 숙였지만 소용없었다. 매주 촛불 집회를 찾는 시민은 계속 늘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우왕좌왕하던 정치권에 탄핵을 밀어붙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의 분노가 거리에서 폭발한 이번 촛불 집회는 1960년 4·19 혁명,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세 번째 시민혁명”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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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안 가결] 2만명에서 232만명으로…'횃불이 된 촛불' 권력을 심판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한 지난 10월29일 1차 촛불 집회는 2만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1만2000명)으로 시작했다. 촛불 민심은 지난주 6차 땐 232만명(경찰 추산 43만명)으로 급증했다.

촛불은 갈수록 횃불로 커졌다. “국정농단 규탄”에 초점을 맞췄던 구호는 “박 대통령 하야” “즉각 퇴진” 등으로 바뀌어 갔다. 특정 사회단체 구성원만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주축이 됐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온 국민이 광장으로 나왔다. 어린아이와 함께 나온 가족, 중·고등학생, 대학생, 젊은 연인 등이 촛불을 손에 들었다.

철저한 평화 시위였다. 과거 과격한 시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축제 분위기에 가까웠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를 패러디한 ‘하야가’, 최순실 씨 딸 정유라 씨의 ‘승마 의혹’을 풍자한 말 모양 시위 소품,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LED(발광다이오드) 촛불’ 등을 준비한 시민들은 유쾌하게 광장을 뒤덮었다.

시위대는 매주 청와대에 더 가깝게 다가갔다. 법원은 지난주 6차 집회 때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1~2차 집회 때는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상(청와대 1.3㎞)까지만 허용했다. 시위대와 청와대 간 거리는 400m, 200m, 100m로 매주 단계적으로 줄어들었다.

집회 때마다 경찰과의 야간 대치가 이어졌지만 연행자나 큰 부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법원도 촛불을 든 시민의 응집력과 성숙도를 인정한 것”이라며 “이번 집회의 특징은 시위대 자체가 집회를 통해 질서와 포용, 성숙 등을 학습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촛불 민심은 각자 정치적 셈법이 다른 야권, 머뭇거리는 여권을 질타하며 탄핵 열차를 추동했다. 지난달 당내 합의 없이 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안했다가 돌연 취소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달 초 탄핵 표결에 반대 발언을 한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 등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달 1일 비박계를 포함한 의원 전원이 ‘4월 퇴진, 6월 대선’ 당론을 만장일치로 채택한 새누리당도 촛불 민심의 질타를 면치 못했다. 지난 3일 사상 최대 규모로 열린 촛불 집회에서 시위대는 여의도 새누리당 당사 앞까지 몰려갔다. 탄핵소추의 열쇠를 쥐고 있던 비박계는 “9일 탄핵 표결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지난 4일 밝혔다. 전날 촛불 시위에서 성난 민심을 확인한 의원들이 ‘탄핵 여론에 맞섰다가는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낀 결과였다.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은 이날 성명을 내고 “촛불이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자 국회도 마침내 대통령을 심판대에 올렸다”며 “오늘의 표결을 만들어 낸 건 광장의 촛불이었다”고 했다.

퇴진행동은 10일 ‘박근혜 정권 끝장내는 날’을 주제로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일곱 번째 주말 촛불 집회를 연다. 퇴진행동 관계자는 “탄핵소추안 가결과 별개로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고 국정 역사교과서 폐기와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마지혜/황정환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