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헌재 부총리 "경제 책임진다" 성명…해외 신평사 등에 협조 메일
대외건전성 2004년 때보다 상황 좋아…정부 대응, 당시 틀 유지할 듯


2004년 3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통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었지만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큰 경제 혼란은 없었다.

당시 이헌재 부총리를 중심으로 경제 부처가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시장의 불안을 최소화했고 대외에 한국 경제의 건전성을 알리며 급속한 자금이탈에 대한 우려도 낮췄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9일 현재 2004년과 비교하면 단기외채 등 건전성 지표는 개선됐다는 점에서 대외리스크 대응능력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 최종 판결 전까지 정치 불안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데다 주요 경제지표마저 줄줄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경제 위기가 더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비관 섞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 2004년 탄핵 가결 직후 "경제는 내가 책임" 성명 낸 부총리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 56분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헌정 사상 최초로 통과되자 경제부처는 이 전 부총리를 중심으로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핵안 통과 즉시 긴급간부회의를 소집한 이 전 부총리는 오후 2시 30분께 "책임지고 경제를 챙기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권한행사 정지를 맞아 혼란에 빠진 시장을 향해 경제부처의 수장으로서 부총리가 던진 강한 메시지였다.

이 전 부총리는 이어 금융기관장, 경제5단체장과 잇달아 면담을 하고 "흔들리지 말고 기업 활동에 전념해달라"라며 협조를 당부했다.

당일 저녁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국제 신용평가회사, 해외 기관투자사 등 관계자 1천여명에 협조 이메일을 발송했다.

이 전 부총리는 이메일에서 현 경제정책의 기조를 유지하면서 정책 운영의 최우선을 경제와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데 두겠다고 강조했다.

또 과거 위기를 극복한 경험과 능력을 감안해 한국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협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외환위기에 대한 기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선제적으로 대외에 정부의 위기 극복 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탄핵 가결 이틀째인 13일에는 당시 이남순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나 경제 안정을 위해 노동계가 협조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당시 재정경제부는 대통령 탄핵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금융시장과 기업을 중심으로 심리적인 안정감을 심어주는데 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 기획재정부는 2004년 탄핵 당시 정부의 대응안을 준용해 비상계획을 이미 짜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호 부총리는 긴급 국무회의, 긴급 경제관계장관회의 등에 참석하고 난 뒤 경제5단체장, 한국노총 등과 잇따라 면담을 하고 경제 안정을 위한 협조를 당부할 계획이다.

또 해외 신용평가사에 한국에 대한 신뢰 유지를 당부하는 협조 이메일을 보내고 11일에는 외신기자를 상대로 한 간담회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대외건전성 더 튼튼하지만…성장률·대외여건은 암울

2004년 노 전 대통령 탄핵안 가결 때와 비교하면 한국 경제의 대외건전성 지표는 대부분 개선됐다.

지난달 기준 외환보유액은 3천720억 달러로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인 2004년 3월(1천636억 달러)보다 2천억 달러 이상 많다.

외환보유액 대비 단기외채 비율은 2003년 말 32.7%에서 올해 3분기 29.6%로 3.1%포인트 떨어졌다.

단기적 대외지급 능력이 그만큼 나아졌다는 의미다.

외국에서 받을 채권과 갚아야 할 채무의 차이를 나타낸 순대외채권은 2004년 1분기 987억 달러였으나 올해 3분기에는 3.9배 수준인 3천835억 달러로 늘었다.

이는 정국 혼란으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해가더라도 국내 금융시장 전반이나 실물 경제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은 작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경제 상황은 그때보다 더욱 심각하다는 분석이 많다.

노 전 대통령의 탄핵안이 가결되기 직전 해이던 2003년 한국 경제는 고유가와 내수·투자 위축이 맞물리며 2.9% 성장하는 데 그쳤다.

이는 외환위기를 겪던 1998년 이후 최저 성장률이었다.

그러나 당시까지만 해도 경제 성장률은 5%대를 목표로 삼는 분위기였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성장률이 목표치에 가까운 4.9%로 회복했다.

수출도 매달 전년 동기대비 30∼40%씩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목표치가 성장률 3%대로 낮아진 데다 이마저도 쉽지 않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계속해서 고개를 들고 있다.

지난해 2.6% 성장한 한국 경제는 올해는 물론 내년까지 2%대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 경우 한국 경제는 사상 첫 3년 연속 2%대 성장하게 된다.

불안한 미래와 가계·기업부채 때문에 소비·투자가 위축된 가운데 글로벌 경기 둔화, 보호무역주의 대두로 수출은 올해 4월까지 역대 최장기간인 16개월 역성장했고 이후 반짝 상승을 제외하고 마이너스 늪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 불확실성이 더욱 확산돼 경기 하방 위험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크다.

전문가들은 경제 시스템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급히 경제 컨트롤타워가 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백웅기 상명대 교수는 "2004년보다 지금 경제가 더 나쁜 상황"이라며 "임종룡 내정자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정식 인준해서 경제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연합뉴스) roc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