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국회 결정 따라 퇴진"] 국회에 공 떠넘긴 박 대통령…탄핵 피해가며 '시간 벌기' 포석
박근혜 대통령이 29일 대국민담화에서 정치권이 요구해온 ‘질서 있는 퇴진’을 수용한 것은 국회의 탄핵이 확실시되면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외통수에 몰린 데 따른 고육책이라 할 수 있다.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으로 물러나기보다는 ‘명예로운 퇴진’을 선택하는 게 최소한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또 성난 촛불 민심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의미도 있다. 자신의 조기 퇴진 결정이 결국엔 흩어져 있는 보수층을 재결집하는 계기로 작용해 내년 대선 국면에서 야당에 정권을 헌납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다는 해석도 있다.

‘탄핵, 원하는 결과 어렵다’ 판단

청와대는 그동안 5주째 지속된 촛불 민심과 정치권의 하야(下野)·퇴진 요구를 거부해왔다. 지난 20일 검찰이 중간수사 결과 발표로 박 대통령을 최순실 씨 일당과 공범·피의자로 지목하자 청와대는 “차라리 헌법적 절차로 논란을 종식하자”며 탄핵 배수진을 쳤다.

이런 강공에는 탄핵 가결 정족수(200명)를 채우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론이 돌아설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작용했다. 하지만 이런 예상은 빗나갔다. 지지율은 5%에서 4%로 더 떨어졌고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시위대는 갈수록 늘어났다. 새누리당 비박(비박근혜)계 의원을 중심으로 탄핵에 찬성하는 여당 의원이 40명을 넘기면서 탄핵 가결은 기정사실화됐다. 게다가 30일부터 시작되는 국정조사, 최장 120일 동안 이뤄지는 특별검사 수사 등을 고려하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서도 ‘원하는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이런 가운데 ‘내부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사정(司正) 라인 두 축인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최재경 민정수석이 검찰의 중간수사 결과 발표 후 사표를 던졌다. 박 대통령은 두 사람의 사의 철회를 설득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김 장관의 사표는 7일 만인 지난 28일 수리하고 최 수석은 보류하는 결정을 내렸다. 탄핵과 내부 붕괴라는 이중 압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착잡한 수석들 > 청와대 참모들이 29일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를 듣고 있다. 오른쪽부터 허원제 정무수석, 최재경 민정수석,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강석훈 경제수석, 현대원 미래전략수석.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 착잡한 수석들 > 청와대 참모들이 29일 춘추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를 듣고 있다. 오른쪽부터 허원제 정무수석, 최재경 민정수석, 김규현 외교안보수석, 강석훈 경제수석, 현대원 미래전략수석.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퇴임변’ 연상시키는 담화

박 대통령은 이날 담화에서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 결정에 맡기겠다”고 밝히면서 퇴진 시기와 조건 등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청와대 참모는 “시기와 조건을 달면 다른 의도가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지 않겠느냐”며 “정치권이 합의하는 로드맵에 따라 물러나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여야 정치권이 논의해 국정의 혼란과 공백을 최소화하고 안정되게 정권을 이양하는 방안을 만들어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다. 정치권에 공을 완전히 넘긴 것이다.

여기에는 정치권이 합의를 쉽게 이끌어낼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시간을 벌겠다는 생각도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눈앞에 닥친 탄핵안 표결을 막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 인식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야당은 “탄핵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고 반발하고 탄핵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입장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박 대통령이 “저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정치권도 지혜를 모아달라”고 밝힌 것은 정치권에 탄핵 대신 조기 퇴진 카드를 받으라고 압박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이날 ‘퇴임의 변’을 연상케 하는 발언을 했다. “(1998년 정계 입문 이후) 지난 18년 동안 국민 여러분과 함께했던 여정은 더없이 고맙고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미르·K스포츠재단의 강제 모금 지시 의혹과 관련,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한 일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개인적 이익도 취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것은 결국 저의 큰 잘못”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