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접민주주의 학습의 장' 된 촛불시위…시민평의회로 열망 표현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요구하며 5주째 이어진 26일 서울도심 촛불시위는 130만명(경찰 추산 26만명)이 행진하는 와중에도 충돌이나 마찰이 없는 등 성숙한 시민의식이 다시 빛을 발했다.

특히 이날 시위는 일몰 이후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 '턱밑'인 청운효자동 주민센터까지 최대 인파가 행진하는 등 유례없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도 충돌이나 몸싸움이 빚어지지 않았다.

서울 이외에 각 지역에서 벌어진 집회도 평화시위 기조에 함께했다.

경찰도 시민의 평화시위 의지와 법원의 집회·시위 보장 판결의 의미를 생각한 듯 시위대를 자극할수 있는 방송 등을 최소화했다.

◇ 평화시위 열망 보여준 행진
서울 도심 '5차 범국민대회'를 마치고 오후 8시부터 진행된 이른바 '청와대 포위 행진'은 마치 박 대통령을 당장 끌어내릴 것 같은 이름과는 반대로 느리고 단호하지만 평화롭게 진행됐다.

주최 측 추산 130만명(경찰 추산 26만명)은 자하문로와 효자로, 삼청로로 줄을 지어 행진하면서 '박근혜는 퇴진하라' 등 구호를 크게 외쳤지만 "합법적으로 신고된 경로로 행진하자"는 주최 측의 안내에 따라 행진했다.

시위대는 '박근혜는 퇴진하라', '내려와' 등 구호를 크게 외치면서 질서있게 움직였고, 경찰과의 물리적인 충돌은 피하려는 모양새를 보였다.

술에 취한 일부 참가자가 경찰에 맞서는 등 조금이라도 폭력적인 모습이 보이면 다른 참가자들이 나서서 '평화시위'·'비폭력' 등 구호를 외쳐 행동을 막았다.

앞서 오후 4시부터 시작한 사전행진도 집회 참가자 주최 측 추산 20만명(경찰 추산 11만명)이 자하문로와 삼청로 등을 이용해 청와대 인근까지 행진했지만, 평화롭게 마치고 돌아와 본집회에 참석했다.

경찰도 해산명령 등으로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고 전광판 등을 활용해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세요"라고 안내했다.

다만 이 행진이 끝난뒤에도 법원이 허용한 시한인 오후 5시30분 이후에도 수백명의 참가자들이 신교동로터리·창성동 별관·세움아트스페이스 앞에 남아 경찰과 대치하며 일부 몸싸움을 하기도 한것은 '옥의 티'로 지적됐다.

대전 서구 갤러리아타임월드 앞에서 열린 시국대회에 참석한 심한나(35·여)씨는 "지난주에도 여섯살 아이와 함께 촛불 집회에 왔었는데, 아이가 다녀온 뒤 내게 '민주주의가 뭐냐'고 물었다"며 "아이에게 민주주의는 대통령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뜻을 묻는 것이라고 설명해 줬다"고 말했다.

심씨는 "우리가 평화시위를 계속해 결국 정권이 바뀌게 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우리 힘으로 우리나라를 변화시켰다는 것을 아이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번에도 온 가족이 함께 나왔다"고 강조했다.

대구 중앙로 대중교통전용지구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4차 시국대회'에서도 시민들은 행사가 이어지는 동안 촛불과 피켓을 들고 화답했으며, 1시간 동안 이뤄진 거리 행진에서도 경찰과 별다른 충돌없이 평화집회를 이어갔다.

염형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평화시위는 국민의 뜻이 왜곡되는 일을 막겠다는 집단지성의 결과라고 본다"며 "폭력 시위를 하게 되면 상대가 반드시 그것을 악용할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 이를 피해가면서 최대한 합리적이고 강력하게 의사전달을 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염 위원장은 "국민이 단순한 분노 표시를 넘어 최대한 절제하면서 목소리를 냄으로써 사회적으로 무언가를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며 "이젠 오히려 '시위 참가자들 평화시위를 했나' 여부에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국민 수준을 얕보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고 논평했다.

◇ "쓰레기는 저에게 주세요"…솔선수범 집회
1∼4차 집회와 마찬가지로 집회가 끝난 이후 솔선수범해서 쓰레기를 치워 한곳에 모으는 등 자원봉사자들의 바쁜 손길도 계속됐다.

이날은 내린 눈이 녹아 바닥이 다소 질척한 상황이라 집회 당시 젖은 유인물과 손피켓 등이 물에 분 채로 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집회가 끝난 이후에는 군데군데 모아놓은 쓰레기더미가 남아있을 뿐 광화문광장 바닥은 집회 전과 마찬가지로 깨끗한 모습을 되찾았다.

주최 측에 소속한 자원봉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저마다 자신이 가져온 쓰레기를 스스로 챙겨가거나 모아두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 수능을 본 고등학생 안봉근(18)군은 행진 현장인 신교동로터리에서 '쓰레기 주세요'라는 문구를 적은 종이와 용돈으로 산 쓰레기봉투를 들고 사람들로부터 쓰레기를 받아 모았다.

안군은 "이렇게 시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데 혼자 집에만 있을 수 없어 나왔다"고 말했다.

외투 속에 교복을 입고 나온 안군은 "이름이 지금 문제가 되는 청와대 그분과 같다.

수시를 보고 왔는데 거기서도 애들이 이름을 보고 웃었다"면서 명찰을 보이게 하고 있으면 어떻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 돼요 저 맞아 죽어요"라며 웃었다.

광화문광장에서 분리수거 봉사를 한 국민대 2학년 하지원(여)씨는 "사실 제가 첫 투표 때 박근혜를 찍어서 죄송한 마음에 청소하고 있다"고 말했다.

◇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 '거리 학교'
집회 참가자들이 평화시위 기조를 이어나가는 데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표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오후 1시 서울광장 2차 시민평의회는 간접 민주주의 한계를 느낀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만민공동회' 자리로 열렸다.

김승민(50)씨는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박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식지 않게 계속 광장에 모이는 것"이라며 "외국에는 망신을 당하는 일일 수 있지만 시민이 평화적으로 모이는 것은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최요섭(32)씨는 "국민소환제를 포함한 상시 국민투표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며 "현재 지방자치단체장에게만 있는 주민소환제를 대통령·국회의원에 대해서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해 좀더 국민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직접민주주의에 한층 가까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재현(81)씨는 "전국을 조직화해 국민의 의견을 낼 수 있는 대의원회를 만들고 국민이 하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고, 청소년 김진우(14)군도 "한 사람이 권한을 독점하지 못하게 3명이 권력을 동등하게 갖고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정치 체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갔다.

모든 공직자의 발언을 녹음해 기록하고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과 국민감사원을 만들자는 제안, 검찰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이어졌다.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시민평의회를 열자는 요청도 나왔다.

(권영전 김은경 박주영 설승은 이승혁 이효석 채새롬 최수호 최평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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