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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이 야당 주도로 지난달 23일 국회에서 처리된 뒤 이어져 왔던 새누리당의 ‘국정감사 보이콧’이 끝났다. ‘보이콧 정국’은 지난 2일 새누리당의 ‘회군’으로 마무리 됐지만 10일 가까이 보여줬던 정치권은 ‘구태 종합판’이라고 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실망스런 모습을 보여줬다. 정치에 대한 혐오증·국회 무용론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게 일반적인 평가다.

상대를 굴복시키려 할 뿐 설득과 타협의 기술은 애시당초 없었다. 여야 모두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타협이 끼여들 틈 조차 없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새누리당은 국감에서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야당의 문제제기를 피하려는 목적이 있지 않았느냐는 지적이다. 야당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보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바터용’으로 해임안을 밀어붙였다는 의혹의 시선이 던져진다. 그렇다면 해임안 갈등은 각 당의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얘기다.

해임안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야당의 힘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새누리당은 협상에 의한 것이 아닌 여소야대의 벽에 부딪혀 일방적으로 회군했다. 끝까지 타협의 정신을 보여주지 못한 채 모두가 패배자로 귀결됐다. 20대 국회가 시작하자 마자 여야 할 것 없이 협치와 변화, 개혁, 민생국회를 외쳤지만 행태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 이번 해임안 정국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여당은 야당될 연습, 야당은 집권 여당 될 생각을 버린듯하다는 비판마저 나올 정도다.

더 큰 문제는 내년 12월 치러지는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힘겨루기는 더 심해질 것으로 예상된다는 점이다. 현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법안 처리는 물 건너갔다는 얘기가 벌써부터 나온다. 내년 대선까지라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자조들이 나돈다. 다음 총선이 있는 2020년까지 이렇게 정국은 암울한 가시밭길을 예고하고 있다.

◆조정자 역할 못한 국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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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국회의장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비판 뿐만 아니라 조정자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지난달 23일 밤 해임안 처리 과정에서 정 의장은 날짜를 넘겨 본회의를 계속 열기 위한 차수 변경을 했다. 이 과정에서 여야 원내대표들과 대면 협의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여야가 첨예하게 갈등을 빚는 현안의 경우 국회의장은 한두번 정도 말미를 주는게 과거 보통의 예였다. 가령, 특정한 시간을 지정하고 그 때까지 여야가 합의하지 못하면 의장이 직권으로 그 현안을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식이다. 여야에 타협을 압박하는 하나의 수단이자, 협상의 여지를 주기 위함이다.

이번에 정 의장은 그런 절차를 공개적으로 밟지 않았다. 차수를 변경해 해임안을 일방적으로 처리, 여당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빌미를 줬다는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차수 변경 과정에서 변경안을 담은 문서를 김도읍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에게 전해 법적인 문제가 없다는게 정 의장 측 설명이지만 법대로만이 아닌 정치적인 운용의 묘를 살려야 하는게 국회의장의 역할이다.

‘맨입’으로 안된다는 발언을 해 정치적 중립을 위반했다는 지적도 받았다. 새누리당이 국감 복귀 명분으로 정 의장의 사퇴 요구에서 사과로 수위를 조절했으나 정 의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 의장은 정기국회 개회사에서도 정파적인 발언으로 국회 파행의 원인을 제공했다. 강경한 태도로 여당의 보이콧을 꺾었다고 하지만, 앞으로 그의 정치적 행보에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전략도, 리더십도 없이 ‘갈팡질팡’한 새누리당

새누리당은 집권 여당이 국감을 보이콧하는 사상 초유의 행동을 보여줬다. 해임안 처리가 과연 여당이 국감을 보이콧하고 여당 대표가 단식에 들어갈만 한 사안이었느냐라는 점에 대해 여당 내부에서 조차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집권 여당의 책임을 망각한 처사라는 비판이 나온다. 여소야대라는 새로운 정치 지형에 걸맞는 협상적략도 갖추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이콧을 단행한 것도 무리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빈손 회군은 여당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지적이다. 강경 투쟁에 대한 내부 이견이 노출되면서 전략과 리더십이 효과적으로 작동 못했다.

국감 복귀 결정은 결국 국감 보이콧에 대한 여론 악화가 주된 요인이었다.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당 대표가 국감 복귀를 선언하자 강강파 의원들이 그 결정을 뒤집어 버렸다. 당 차원에서 보자면 ‘비상시국’에서 리더십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당내에서는 그나마 이정현 대표의 단식이 아니었다면 국감 보이콧을 고수한 강경 친박(친박근혜)과 국감 참석을 주장한 비박(비박근혜)계간 싸움이 극한 대결로 치달았을 가능성이 컸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 의장의 미국 출장과 정 의장 부인에 대한 새누리당의 여러 의혹 제기도 무리수 였다는 평가가 많다.

◆야당의 무리한 해임안 처리

김 장관 해임안 처리가 야당으로서 과연 승부를 걸 만한 사안이었느냐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 회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해임안을 처리하면 국정 파행이 뻔히 예상되는데도 야당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야 할 만큼 절박하고 시급한 사안이었느냐는 점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쟁으로 국회가 마비되면서 국감에서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문제를 비롯한 현 정부의 각종 의혹에 대해 총공세를 펴겠다는 전략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는 점도 야당으로선 마이너스다.

또 해임안 처리에 대한 적절성 논란도 일었다. 새누리당은 해임 건의 제도 취지상 국무위원 직무를 수행하면서 생긴 문제에 대해 해임안을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 해임안도 대부분 업무와 관련한 논란 때문이었다. 감 장관의 낮은 이자 대출 의혹과 모친의 빈곤층 의료 혜택 의혹 등을 놓고 인사 청문회 과정에서 여야간 공방이 벌어졌고, 청문 보고서에 그런 의혹들을 적시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게 국민의당 청문위원 3명의 견해였다.
야당이 해임안을 정치적 흥정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것도 문제다. 야당은 해임안을 철회하는 조건으로 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활동기간 연장과 어버이연합 자금 지원 의혹 청문회 등을 요구했다. 결국 야당은 해임안 처리 과정에서 ‘힘자랑’ 한 것 이외에 얻은게 없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조차 나온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