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무원들의 정책 품질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설익은 대책으로 초기 위기 대응에 실패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내놨다가 여론의 반발 등에 밀려 철회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세종시 공무원 15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고위공무원 절반 이상이 예전에 비해 정책의 질이 떨어졌다고 답했다.

이런 ‘부실 정책’은 기본적으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 리더십 부재,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 등 관료사회의 고질적 병폐에 기반하고 있다. 여기에 세종시 이전 4년이 지나면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업무 비효율과 공무원의 좁아진 시야가 정책 부실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세종시 이전 4년-길 잃은 관료사회] "에어컨 4시간만 틀어라" "미세먼지 주범은 고등어"…잇단 '정책 헛발질' 국민 짜증지수만 높여
◆메르스로 현실화된 ‘세종 리스크’

2012년 9월 국무총리실을 시작으로 중앙부처의 1단계 세종시 이전이 이뤄지던 당시부터 부실 정책 양산에 대한 우려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지난해 5월 세종시 이전 후 처음 맞는 국가 비상상황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를 겪으면서 우려는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메르스 감염 1번 환자가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도 모른 채 병원을 옮겨 다니도록 방치하는 등 정부는 초동대응에 실패해 메르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메르스 환자는 수도권에서 집중 발생했지만 대책본부는 세종에 있었다. 공무원들은 서울(국회·청와대)과 세종(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충북 오송(감염병 현장 대응조직인 질병관리본부)을 오가느라 긴밀한 의사소통과 일사불란한 대응 능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사소통 부족은 정부가 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간과하게 한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지역균형이란 논리로 주요 공공기관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정부를 중심으로 한 정책 대응력은 더 현격히 떨어졌다. 경제부처 A실장은 “정책 수요자들에겐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전력 문제가 터져 대책회의라도 열라치면 전국에 뿔뿔이 흩어진 전력 에너지 관련 기관들에 연락해 회의를 소집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린다”며 “이런 환경에서 신속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 잇따라

세종시 이전 4년이 지나면서 부실정책은 더욱 늘어나고 있다.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을 잇따라 발표해 여론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고 ‘없던 일’로 하는 사례가 되풀이되면서 공무원들의 현실 감각이 크게 위축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5월 미세먼지 대책 수립 과정에선 환경부가 “고등어를 주방에서 구우면 미세먼지가 실외 ‘나쁨’ 수준의 23~45배에 이른다”며 고등어를 미세먼지의 ‘주범’으로 모는 ‘촌극’마저 빚어졌다. 환경부는 이 발표로 고등어값이 폭락하고 어민들의 항의가 거세지자 2주 만에 “요리할 때 환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수습에 나서야 했다.

폭염 속에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불만이 폭증해가던 지난달엔 산업통상자원부가 “하루 네 시간 이하로 틀면 냉방요금이 10만원을 넘지 않는다”고 언급해 국민의 ‘짜증지수’를 높였다. 산업부는 ‘부자 감세’인 누진제 완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 전혀 없다고 버티다가 대통령 지시가 나오자마자 몇 시간 만에 입장을 바꾸기도 했다.

◆“일부 조직 수도권 재이전 검토해야”

최근 한진해운 법정관리에 따른 물류대란도 마찬가지다. 업계에선 일찌감치 한진해운 법정관리에 따른 산업 전반의 충격을 경고했지만 정부는 상당수 선박의 발이 묶이고 나서야 범정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는 등 ‘뒷북 대응’에 나서 피해 최소화에 실패했다. 일선 공무원들이 세종시에 고립돼 시장과의 소통을 소홀히 하면서 전문성이 떨어지고 정책 대응력도 둔화된 탓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이른바 ‘김영란법’이 시행되면 공무원은 민간전문가와의 정책협의나 시장 소통을 더욱 줄이고 갈수록 세종시에서 ‘고립화’되는 경향이 강해질 것”이라며 “국가 경쟁력과 효율성 제고 차원에서 이제는 진지하게 대안 모색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국민투표를 거쳐 청와대와 국회까지 완전히 세종시로 이전하거나 그게 안 된다면 부처별로 시장과 밀접하게 소통해야 하는 일부 과(課)를 선별해 서울이나 과천 등으로 다시 이전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