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정치가 뭐길래] JP의 '황혼 정치'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싶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는 2000년 자신이 총재로 있던 자민련이 총선에서 패배한 뒤 이인제 당시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부터 “지는 해”라는 말을 듣자 이렇게 응수했다. 그 뒤 그는 기회 있을때 마다 비슷한 말을 했다. 지난 3월 펴낸 회고록 ‘김종필 증언록’에서 “나는 좀 더 장엄하게 정치와 이별하고 싶었다.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자 했다. 온 지구를 하루종일 덥혔던 태양이 서산에 이글거리며 지는 것처럼 그렇게 내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2001년 1월9일 63빌딩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도 “서쪽 하늘을 전부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고 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킹메이커를 하겠다는 의욕의 과시였다. 그러던 그는 2004년 정계를 은퇴하면서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고 했다.

올해 만 90세. 내년 대선을 앞두고 그의 서울 청구동 자택에 최근 대선 주자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강력한 대선 후보로 거론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5월 JP 자택을 방문했다. 두 사람은 배석자 없이 30분간 대화를 나눴다. 반 총장은 인사차 방문이라고 했지만 ‘충청권 맹주’로 불렸던 JP와 만남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반 총장도 충청(충북 음성) 출신이어서 내년 대선과 관련해 ‘충청 대망론’이 흘러나왔다.

JP는 회동 직후 반 총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기자들의 물음에 “내가 얘기할 게 있느냐. 비밀 얘기만 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대선과 관련한 깊숙한 얘기를 나눴음을 짐작케 했다.

윤상현 새누리당 의원은 지역구(인천 남을)에서 복당 인사를 마친 직후인 지난 6월20일 JP의 자택을 찾았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충청포럼 중앙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JP에게 큰절로 인사를 하는 등 각별한 예의를 갖췄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17일 JP자택에 들러 취임 인사를 했다.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도 19일 JP를 만났다. 박 위원장은 “건강이 아주 좋아보이신다”고 하자 JP는 “몸이 좋지가 않다”고 했다. JP는 “골프도 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말했다. 이어 박 위원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7주기 추모식을 언급하자 “이제 큰 사람들이 다 죽었다”며 “금년에는 내가 죽을 판”이라고 말했다. JP는 박 위원장과 비공개로 약 30분간 대화를 나눈 뒤 “냉면 잘하는 집이 있는데,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를 데리고 와서 같이들 식사하자”고 했다. JP는 앞서 안 전 대표와도 면담했다.

정치권 유력 인사들의 잇단 JP방문은 충청 표심을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충남 출신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JP의 충청 지역 영향력이 아직 적지 않은 만큼 충청 표심을 겨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정치 경험이 풍부한 만큼 정치적 ‘훈수’와 지원을 바라는 것 아니겠느냐”고도 했다.

아직 JP의 ‘정치 태양’은 지지 않았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