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성 인정 안된다" 논리 고집…민간단체 "특별법 문제투성이"

지난 5월 제정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 시행도 되기 전부터 '반쪽짜리'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12일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특별법은 1945년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우리 국민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았다.

대한적십자사에 등록된 원폭 피해자 또는 일본 정부가 발급한 피폭자 건강수첩 소지자를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한다는 내용이 더해졌다.

또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원폭 피해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기념사업을 할 수 있게 했다.

1세 피해자 2천500여 명에게 제공하는 매년 한 차례 무료 건강검진, 진료비 본인 부담금 지원, 진료 보조비(통원 교통비) 혜택은 특별법 제정 이전과 차이가 없다.

지난해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 정부는 올해부터 건강수첩 소지자에게 최고 한도 없이 진료비 본인 부담금 전액을 지원하지만 한국 정부 지원 내용은 그대로다.

일본 정부 지원을 받는 피해자에게는 우리 정부가 별도 지원을 하지 않는다.

진료 보조비는 기본적으로 매달 10만원씩 지급한다.

특히 원폭 피해 당사자들과 그 가족이 줄곧 주장해온 2세 등 '후손 피해자'를 지원하는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

2002년 선천성 면역글로불린결핍증을 앓던 김형률(1970년∼2005년) 씨가 2세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알리고 2세 환우 문제를 공론화한지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사실상 계속 방치되는 실정이다.

정부는 원폭 피해의 유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원은 물론이고 피해자 현황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05년 1세 피해자 가족사항 기입 자료를 토대로 단순 추산한 2세 피해자를 7천600여 명으로 봤다.

현재 한국 원폭 2세 환우회에 등록된 피해자는 1천300여 명이다.

사회적 편견 등을 우려해 등록하지 않은 사람을 고려하면 1만∼2만명에 달할 것으로 관련 단체는 추산한다.

3세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정부도, 민간단체도 자세한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 측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시행된 미·일 공동연구 결과를 보면 후손에 대한 원폭 피해 연관성이 명확하지 않다"며 "현재로는 정부가 나서서 관련 연구를 수행할 계획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2004년 발표된 국가인권위원회 자료 등을 보면 원폭 2세 피해자들은 비교 집단보다 심장 계통 질환, 빈혈, 우울증, 선천성 기형 등을 많게는 수십배나 더 앓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보면 원폭 피해의 유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정부측 태도에도 문제가 적지 않다는 것이 피해자들 주장이다.

한국 원폭 2세 환우회, 합천평화의집 등 관련 시민단체들은 더 늦기 전에 후손 피해자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특별법 개정을 요구했다.

한국인들이 강제 징용되는 등 일제 치하에서 불가피하게 일본으로 갔다가 '역사적 피해'를 입은 점을 후손에게 교육하는 등 사회적 관심을 높여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한정순 한국 원폭 2세 환우회 명예 회장은 "몇 년 전에 특별법 제정 서명운동을 할 때 일부 시민들은 한국인 원폭 피해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며 "국사 교과서에조차 이런 내용이 전무한데 후손 피해자들은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2·3세 피해자에 대한 면밀한 실태조사와 의료비 지원 등 내용을 포함해 특별법을 개정해야 한다"며 "후손 피해자 문제를 제기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실태조사조차 안 하고 있다는 것은 정부의 의지가 부족하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이남재 합천평화의집 사무총장도 "특별법 제정 자체의 상징적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사실상 문제 투성이"라며 "체르노빌·후쿠시마 사고 사례에서 보듯 방사능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데 정부가 너무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원폭 1세 피해자 가운데 가장 많은 600여 명이 살고 있어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경남 합천에는 합천평화의집이 처음으로 2세 피해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어 주목을 끌기도 했다.

2세 피해자를 위한 쉼터는 원폭 피해지인 일본에서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합천평화의집 측은 "6∼10명 정도가 입소할 수 있는 쉼터 조성에는 정부 지원도, 기업 후원도 없었다"며 "열악한 상황이지만 민간에서 먼저 한 걸음을 내딛은 만큼 향후 정부·기업에서도 원폭 후손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확대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창원연합뉴스) 김선경 기자 ks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