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입장표명 미룬 채 결과분석…"외교환경 더 어려워져"
中 수용 거부, 미중 갈등 격화…선택 강요받는 상황 우려


남중국해를 둘러싼 필리핀과 중국간 분쟁에서 국제 중재재판이 12일 사실상 필리핀의 손을 들어준 데 대해 중국이 수용 불가로 반발하면서 남중국해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다.

국제 중재재판의 판결에도 남중국해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보다 오히려 미국과 중국간 긴장의 수위가 높아질 것으로 보여 우리 외교에도 큰 도전요인이 될 전망이다.

필리핀 정부는 판결을 환영했고, 일본의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상은 성명을 통해 "당사국은 이 판단(판결)에 따를 필요가 있다"면서 사실상 중국의 판결수용을 압박했다.

그동안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중국을 강하게 압박해온 미국도 판결수용을 촉구할 것으로 보인다.

중재재판 판결 이후 필리핀은 물론 미국과 일본 등이 한편에 서고 이에 중국이 맞서는 대립구도가 더욱 뚜렷이 형성되고 있다.

중국은 중재판결을 앞두고 지난 5일부터 11일까지 남중국해 파라셀 군도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여 긴장수위를 끌어올렸다.

시진핑(習近平) 국가 주석이 최근 인민해방군에 전투준비태세를 명령했다고 미국에 서버를 둔 중화권 매체 보쉰(博迅)이 보도하기도 했다.

중재재판 판결 이후 중국이 남중국해에서의 군사적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미국이 견제에 나설 경우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간 긴장은 더욱 격화될 전망이다.

우리 정부와 각각 포괄적 전략동맹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맺고 있는 미중이 남중국해에서 정면으로 패권을 다투는 형국이다.

이에 따라 우리 외교환경도 더욱 험난해지고 있다.

정부의 한 소식통은 "우리의 외교환경이 아주 어려워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사드·THAAD)의 한국 배치 결정으로 중국과 러시아가 거세게 반발하면서 한중, 한러관계는 물론 우리 외교안보 지형이 시험대에 오른 상황이다.

우리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남중국해 문제 자체는 물론 중재재판 결과에 대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이 중재재판 판결이 나오기 전에 '관계국은 판결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하기를 희망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라고 한국에 비공식 요청을 했다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지난달 3일 보도한 바 있다.

일본 정부가 중재재판 결과에 대해 신속히 중국 측에 대해 판결수용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놓은 데 비해 우리 정부가 즉각적인 반응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고민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외교부는 주변국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며 중재재판 판결 결과를 면밀히 분석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 입장을 내놓을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처럼 중국 측에 대해 중재재판 결과의 수용을 명시적으로 촉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움직일 수 있는 운신의 폭이 넓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조준혁 외교부 대변인은 중재재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이뤄진 정례브리핑에서 판결 결과를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도 "우리는 중요한 해상 교통로인 남중국해에서의 평화와 안정 유지, 항행과 상공비행의 자유 보장에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동안 여러 계기에 분쟁은 국제적으로 확립된 행동규범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함을 표명해왔다"면서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항해·상공비행의 자유 보장과 국제법적 규정에 따른 평화적 해결 등 우리 정부의 이 같은 기조는 동맹관계인 미국 측의 입장을 반영하면서도 한중관계를 고려해 고육책으로 해석돼왔다.

다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0차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모든 관련 당사국들은 남중국해 행동선언(DOC)의 문언과 정신, 그리고 비(非)군사화 공약들을 준수함으로써 남중국해의 평화, 안정 증진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면서 비군사화 공약준수를 거론했다.

우리 정부가 비군사화 공약준수의 대상을 명확히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해석됐고, 우리 정부가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기존보다는 한 발 더 나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서울연합뉴스) 이귀원 기자 lkw77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