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전직의 폭로
예상보다 훨씬 볼썽사나운 전개다. 조선 구조조정 책임론을 두고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과 ‘친박 실세’들 간에 벌어지는 폭로와 난타전 얘기다. 홍 전 회장은 “정부가 깡패처럼 압박했고, 산은은 들러리에 불과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는 최경환 전 부총리, 안종범 전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등 쟁쟁한 이름도 거명했다. 지목된 실세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의견조율 과정에서 다소 험한 말이 오갔기로서니 그렇게 과장해서야 되겠느냐”며 불쾌해한다.

실세들의 내밀한 고공전은 무성한 ‘카더라 통신’도 양산 중이다. 야당은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즉각 청문회를 주장하고 나섰다. 앞만 보고 달려도 시원치 않을 구조조정 열차가 ‘정치의 늪’으로 점점 궤도이탈하는 모양새다. 이번 폭로전에서 드러난 사실들은 권력 상층부의 오래된 문제가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우선 취약한 국가운영 시스템과 허술한 의사결정 과정이 그대로라는 것이다. ‘서별관회의’라는 밀실회동에서 벌어진 일들은 구조조정이란 중대사안을 둘러싼 핵심 브레인들의 논쟁으로 보기엔 너무 유치하다. “시키는 대로 했다”거나 “강압은 없었다”는 주장이 전부다.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가치논쟁은 찾아볼 수 없다. 시정잡배들의 저급한 진실게임이 있을 뿐이다. 책임 있는 공직자로서 당시의 상황판단이나 조치과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은 안 보인다. 홍 전 회장의 폭로는 진위와 무관하게 자폭 수준이다. 설사 누군가의 강압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고 해도 자신의 잘못이 희석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국책은행 자금을 집행하는 최고 책임자로서 능력 부족이었음을 환기시킬 뿐이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현직일 때가 아니라 전직이 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명징해진다는 사실을 홍기택 전 회장은 기억해주기 바란다. 물론 그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관료집단의 집요한 ‘왕따’에 대해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홍 전 회장에 대한 질투조차 산더미같다는 사실도 동시에 기억해야 마땅하다.

홍 전 회장은 이번 정부 초대 산업은행 회장에 임명될 만큼의 실세다. 고위 경제관료들이 정권 초에 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벌였다는 갖가지 해프닝은 지금도 회자된다. 그런 홍 전 회장이 ‘팽’당해 폭로전으로 버티고 있다는 사실은 냉혹한 권력의 속성을 보여준다. ‘모피아’라는 말로 대변되는 폐쇄적 관료시스템이 여전히 강고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