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지역 정가 핵심 권력 부상…소지역주의 우려
전문가 "인구 감소로 6개 지자체 묶인 공룡선거구 탄생 가능성도"

"주민 정서부터 다르다 보니 사안이 벌어지면 어떻게 조정될지 모르겠습니다."

5개 지방자치단체가 하나의 선거구로 통합된 강원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에서 올해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도왔던 A 지방의원은 지역 현안을 어떻게 풀어갈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후보자를 당선시킨 기쁨은 잠시뿐 앞으로 산적한 지역 현안을 정책에 반영하는 게 예전보다 더 어려워진 현실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철원·화천·양구·인제 지역구는 이미 4개 지방자치단체가 묶여 있어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국회의원 혼자서 4륜 차를 타고 곳곳을 누볐지만, 주민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는 데 한계가 많았다.

이번 상황에서 접경지역과 주민 정서 자체가 다른 홍천군과 통합된 것이다.

차라리 남북한 대치와 군사시설보호법에 따른 고통을 함께 겪는 동부전선의 고성군과 통합했더라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는 "주민 정서가 서로 다른 상황에서 국회의원 혼자서 의견을 수렴하려면 단일 선거구에서 하루면 충분한 게 여기서는 보름이 걸릴 수도 있다"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정책에 효과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시스템이 현재로써는 없다"고 걱정했다.

◇ 전국 공룡선거구 지역 갈등 '지뢰밭'…"소지역주의 우려"


20대 총선에서 강원은 5개 지방자치단체가 하나의 선거구로 묶인 공룡선거구가 무려 두 곳이나 탄생했다.

19개 총선까지 단일 선거구를 유지했던 홍천·횡선 선거구가 공중 분해되면서 접경지역 및 폐광지역과 통합됐기 때문이다.

휴전선 주변을 따라 어깨를 마주한 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와 태백·영월·평창·정선은 이미 4개 지방자치단체가 하나로 묶여 있는 거대 선거구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도 면적에 가까운 홍천군을 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와 통합하고, 횡성군을 태백·영월·평창·정선 선거구에 합치는 선거구 획정이 이뤄지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공룡선거구가 탄생했다.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 면적은 서울 면적의 10배 가까이 되고, 태백·횡성·영월·평창·정선 선거구 면적은 서울시 면적의 9배에 이른다.

공룡선거구의 당선인은 5개 지방자치단체를 거느리는 정치 핵심으로 부상했다.

두 공룡선거구에 소속된 지방자치단체를 합치면 강원 18개 지방자치단체 가운데 10개 지자체(55.5%)가 두 국회의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셈이다.

지자체로서는 국회의원이 지역 현안을 정책에 반영하거나 국비를 확보하는 데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다.

특히 지방의원 공천권을 행사하는 국회의원은 그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공룡선거구는 앞으로 선거운동 과정이나 의정활동 기간 국회의원에 대한 이른바 '줄서기'가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

B 지방의원은 "19대 총선까지는 후보와 현안을 서로 잘 알고 정서도 비슷한데다 호흡도 맞아 역할분담 등 선거운동이 쉬웠는데 갑자기 공룡선거구가 되면서 지역과 상관없는 새로운 후보와 그냥 '멍하게'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며 "차기 지방선거에서 공천받는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공룡선거구는 지역 간 갈등이 커지면서 소지역주의를 조장할 가능성이 크다.

태백·횡성·영월·평창·정선은 하나의 선거구이지만, 올림픽 등 현안마다 주민의 요구가 다르다.

올림픽이 열리는 평창을 제외한 다른 지역은 소외감을 호소하지만, 지역구 국회의원은 공통분모를 내세우고 있다.

기초·광역의원은 지역민의 요구를 외면할 수도 없어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전북은 무주·진안·장수 선거구가 완주군을 포함하면서 4개 군이 하나의 선거구가 됐다.

이들 4개 지자체의 면적은 전북 전체 면적(8천66㎢)의 34.5%인 2천784㎢에 달해 사실상 마을 곳곳의 주민을 만나 얼굴 알리기가 불가능하다
이번에 새로 편입된 완주군의 유권자(7만7천555명)가 나머지 3개 지역을 합한 유권자(6만4천153명)보다 훨씬 많아 소지역주의도 우려된다.

완주가 고향인 국민의당 임정엽 후보는 완주군에서 더불어민주당 안호영 후보를 3천500여 표 차로 앞섰으며, 진안이 고향인 안 후보는 진안군에서 임 후보를 4천여 표 앞섰다.

안호영 당선인은 "후보가 누군지도 모르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하루에 평균 2개 군지역을 돌며 유세를 했는데, 장거리인 데다 길이 좋지 않아 저녁에는 녹초가 되곤 했다"고 토로했다.

충북 괴산은 '남부 3군'으로 불리는 보은·옥천·영동과 통합됐다.

말이 통합이지 사실상 이 선거구의 부족한 인구를 채우는 '수혈용'으로 흡수된 셈이다.

화난 괴산 민심은 총선 기간 내내 역사·문화적 공감대가 없고, 생활권도 전혀 다른 지역을 하나로 묶은 것은 전형적인 게리맨더링이라고 반발했다.

'총선투표반대위원회'까지 구성하고 투표 거부에 나설 움직임도 보였다.

괴산이 통합되면서 4개 군을 합친 이 선거구의 면적은 2천808.85㎢로 서울시(605.28㎢)의 4.6배에 달한다.

읍·면 수만 42곳이고, 마을 숫자는 1천 곳이 넘는다.

가장 북쪽인 괴산군 장연면에서 최남단의 영동군 용화면을 가려면 승용차로 빠르게 이동해도 3시간 걸린다.

재선에 성공한 새누리당 박덕흠 당선인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충북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이어서 관리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무엇보다 선거구 통합으로 상실감에 빠진 괴산 군민들의 정치 불신과 선거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컸다"고 안타까워했다.

경북에서는 영주·문경·예천 선거구와 상주·군위·의성·청송 선거구가 각각 통합됐다.

상주·군위·의성·청송 선거구의 면적은 3천929.63㎢로 서울시 면적의 6배가 넘고, 영주·문경·예천 선거구의 면적은 2천240.85㎢로 4배가량 된다.

이 두 선거구는 경북도 전체 면적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거대 선거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주민의 불만도 많았다.

주민들은 생활권을 중심으로 선거구 조정을 원해 예천은 안동시, 영주는 봉화군, 문경은 상주시와 합쳐지기를 희망했다.

또 예천군과 안동시 지역에서는 총선이 끝났지만, 선거구를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경북 신도청 안동·예천 통합추진위는 생활권이 같고, 경북 신도청을 유치한 예천과 안동의 행정을 합치면서 선거구도 함께 조정하자고 주장한다.

영주에서도 인구를 늘여 문경·예천과 분리된 별도의 선거구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다.

갈라진 민심은 지역발전의 발목을 잡는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 "6개 시군 묶인 초대형 공룡선거구 탄생할 수도 있어"

전국 공룡선거구 당선자는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충북 보은·옥천·영동·괴산 선거구 새누리당 박덕흠 당선인은 "불합리하게 획정된 선거구를 원상태로 되돌리고자 헌법소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강원 홍천·철원·화천·양구·인제 선거구의 새누리당 황영철 당선인도 "주민들을 통합시키는 게 우선이기 때문에 당분간 이 문제는 수면 아래에 내려놓고 21대 선거구 획정논의가 이뤄질 때까지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며 "차기 지방선거가 끝나는 시점에 헌법소원을 내겠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경선 과정이나 선거운동 당시에는 제기됐던 공룡선거구의 문제와 관련해 실제로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선거구 개선으로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공룡선거구 당선인에게 선거구 획정 문제는 이제 시급한 사안이 아니다.

선거구 획정의 문제점을 거론할수록 차기 총선에서도 현재와 같은 선거구에 남아 있을지를 둘러 싸고 주민 간 이견이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5개 지방자치단체가 하나로 묶이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칫 6개 지방자치단체가 묶이는 '초대형 공룡선거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점이다.

현재 선거 선거구 획정은 오로지 인구를 기준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농산어촌의 인구가 감소하는 현실에서는 사실상 대책이 없다.

김기석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룡선거구의 가장 문제점은 국회의원이 지역 현안을 제대로 챙기기 어렵고, 지역주민 의사를 다 대변할 수 없으니 대표성이 떨어지는 것"이라며 "유권자가 자기 지역 출신 후보자에게 표를 몰아주는 소지역주의가 나타나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선거에서 강원 속초·고성·양양 선거구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계속 인구가 줄어들어 다음번에 더 큰 공룡선거구가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며 "인구 말고 면적 같은 다른 기준으로 새로운 걸 만들어내기 전에는 공룡선거구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해용·홍인철·박병기·이강일·배연호·박영서 기자)

(전국종합=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