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소야대, 응답하라 1988
황금분할(黃金分割). 가장 편안하면서도 안정감을 느끼는 사물의 비율을 뜻한다. 대립과 갈등이 한국 정치의 대명사처럼 돼 있지만, 여소야대(與小野大)의 다당제 구도에서도 타협의 정신으로 국회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시기가 있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이끌던 민주정의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4당 분립 구도를 이뤘다. ‘1노(노태우)·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시대였다. 여당은 야당의 동의가 없으면 법안 하나 처리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이런 4당체제에서 여야는 견제와 균형, 타협의 정치문화를 싹 틔웠다는 게 원로·중진 정치인들의 견해다.

여소야대, 응답하라 1988
김대중 전 대통령은 생전에 “여소야대인 13대 때 법안 처리 실적이 가장 좋았다”며 “타협 정신을 발휘해 대부분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회고했다. 13대 국회의 법안 처리율은 81.1%로 19대 국회(15일 현재 42.3%)의 두 배 가까이 됐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3당 구도로 운영되는 20대 국회는 13대 국회 전반기를 선례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이들은 강조한다.

김재순 당시 국회의장은 이런 4당 정치구조를 황금분할로 표현했지만 2년 만에 깨졌다. 1990년 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한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으로 ‘여소야대’ 정국은 막을 내리고 ‘여대야소’로 돌아갔다.

여소야대, 응답하라 1988
20대 국회는 이전과 확연하게 다른 정치 지형이다.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거대 양당 체제에서 국민의당이 더해 확고한 3당 체제가 됐다. 이 때문에 이전과 다른 국회운영 방식이 요구된다.

19대 국회 양당 체제에서 국회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5분의 3 찬성을 요구하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새누리당은 과반을 확보했지만 야당이 반대하면 법안 하나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이 2012년 7월 국회에 제출된 뒤 45개월째 계류돼 있는 게 대표적인 예다. 타협과 협상은 실종되고 대립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4·13 총선 결과 3당 의석 분포를 보면 새누리당(122석)은 무소속(친여성향 7석)과 합해도 과반(150석)에 턱없이 모자란다. 더불어민주당(123석)도 마찬가지다. 새누리당과 더민주 모두 국민의당(38석) 협조가 없으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게 불가능하다.

양당 구도일 때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한 타협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하면 자칫 ‘식물국회’로 전락할 수 있다. 물론 두 당이 민심을 따르면 다른 당이 반대하기 어려운 구조여서 오히려 협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역설도 가능하다. ‘1노(노태우)·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대립하던 13대 국회가 대표적인 예다. 원로·중진 정치인은 13대 국회 전반기 운영 방식을 모범사례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여소야대, 응답하라 1988
“역지사지…야당, 여당의 역할 인정”

1988년 13대 총선 때 민주정의당은 전체 299석 가운데 과반에 턱없이 모자란 125석을 얻는 데 그쳤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이끌던 평화민주당이 70석,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이 59석,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얻어 야 3당이 164석을 차지했다. 민주화 이후 ‘군사정권 견제’가 힘을 발휘한 결과다.

민정당은 정국 운영에 비상이 걸렸다. 어느 한 당의 독주를 허용하지 않는 구도 속에서 여야는 타협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5공 청산 문제로 야 3당은 연합해 여권을 거세게 압박했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으로선 친구인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법처리해야 할 수도 있는 문제여서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당시 평민당 원내총무를 맡아 김윤환 민정당 원내총무와 협상에 나선 김원기 전 국회의장은 “민주화 이후여서 처리해야 할 과제가 엄청나게 많았다”며 “대통령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5공 비리와 지방자치제 시행, 광주민주화운동 등 난제를 여야가 밤을 새워 토론해 하나하나 해결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의장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신에 입각해 야당이 과도한 힘을 앞세워선 안 된다고 생각했고, 여당의 지위와 역할을 존중했다”며 “야당이 오히려 정책과 대안을 많이 내 역대 어느 국회보다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법안처리율을 보면 13대 국회 때 81.1%로 그 이후 14대 국회(82.3%)를 제외하고 현 19대 국회까지 포함해 가장 높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20석)을 갖춘 정당에 국회 상임위원장을 배분하는 것은 당시 여야 타협의 산물이었다.

13대 국회 전반기 타협의 정치에 대해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궁여지책의 결과라는 지적도 있다. 또 당시 민주화 바람을 타고 5공 청산 과제에 여당이 강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었지만 여야 간 타협의 정치문화를 보여준 좋은 선례라는 게 여야 원로·중진 정치인의 일치된 견해다.

김진표 더민주 당선자는 “13대 여소야대 국회에서 대화로 타협했기 때문에 많은 안건을 처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유인태 더민주 의원은 “‘1노·3김’의 여소야대이던 13대 때 국회의원의 인기가 좋았다”며 “시민이 의원들에게 사진 찍자, 사인해달라 했다”고 회고했다.

여소야대 국면 2년 만에 깨져

4당 간 타협의 정치는 2년 만에 깨졌다. 1990년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이 합당하면서 민자당이 탄생했다. 여대야소 국면이 되면서 정치권은 다시 첨예한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민자당 대변인을 맡았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13대 국회 전반기는 타협의 정치문화를 정착시킬 좋은 기회였다”며 “(타협의 정치가)더 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3당이 합당한 것은 맞지 않는 일 아닌가 싶다”고 했다.

박 전 의장은 3당 체제의 향후 국회 운영과 관련, “13대 국회 전반기 타협의 정치를 참고해 운영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을 때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고 지적했다.

홍영식 선임기자/유승호 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