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한국의 민주주의, 인도의 민주주의
출근길에 들른 투표소에서 ‘점 복(卜)’자 기표 용구를 들어올리는 심정이 묘했다. 주권(主權)을 행사하는 표식이 왜 하필 ‘점집’을 떠올리게 하는가. 후보들도, 정책도 뒤죽박죽이었던 이번 선거판을 상징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나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기를, 찍어준 후보가 당선돼서 제발 잘해주기를” 기도하며 한 표를 행사했지만, 지지한 정당과 후보의 정체(正體)를 온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낭패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이번 선거전을 지켜보는 내내, ‘지상 최대의 민주주의 축제’라는 인도의 총선거 풍경이 자주 겹쳐졌다. 인구의 40%대가 문맹(文盲)인 인도에서 정당들은 연꽃, 자전거, 코코넛 같은 그림들을 당(黨)의 상징물로 등장시켜 글을 모르는 유권자들의 투표를 유도한다. 복잡한 정책이나 공약보다 호주머니에 찔러주는 10루피(약 250원), 20루피짜리 봉투에 그려진 당의 상징물을 보고 지지 정당과 후보를 결정하는 까막눈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싸구려 민주주의’의 서글픈 전형(典型)이다.

“한국은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짚고 따져 봐야 할 것들이 많다. 정치와 정당을 시장(市場)과 상품에 비유한다면, 소비자인 유권자들이 선거라는 ‘장터’에서 제대로 상품을 고르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제품 사용설명서’가 있어야 한다. 그게 정당의 정강(政綱)과 정책이다. 한 표가 아쉽다고 정강·정책을 뒤집거나 혼란스럽게 하는 건 물건을 ‘사기 판매’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번 선거과정에서 각 당이 보인 행태에는 엄정한 검증과 결산이 필요하다. 집권당인 새누리당부터가 그렇다. 정부와 여당이 표방해 온 최우선 정책과제 가운데 하나가 노동개혁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기업들에 고용 유연성을 높여주겠다는 게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당 대표가 선거 막판 울산 유세에서, 아홉 분기 연속 적자를 낸 현대중공업의 구조조정을 막겠다고 공언했다. 이 지역에 출마한 당 후보는 “실질적인 고용 안정을 이룰 수 있도록 노동개혁 5법을 막아내겠다”고까지 했다. 당 대표와 국회의원 후보가 대놓고 당론을 뒤집고 정면 배치되는 말을 했는데도 그냥 넘어간다면, 정상적인 정치가 아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다를 게 없다. 전통적 ‘텃밭’이던 광주에서 고전(苦戰)이 이어지자 대표가 지원유세를 내려가 “삼성의 미래자동차산업 공장을 유치해 2만명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경제분야 정책의 트레이드마크로 삼는 당(黨)에서 앞뒤가 안 맞는 얘기다. 공장 유치를 위해 완력을 행사하든, ‘당근’을 주겠다는 것이든 ‘개혁’과 ‘민주화’를 스스로 무색게 했다.

‘정치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정의(定義)를 올바로 내리는 일’이 시급하다. 정책을 전달하는 말이 뒤죽박죽인 곳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선거 이슈 가운데 하나였던 ‘고용 보호’가 단적인 예다.

여야는 울산·거제 지역 선거유세전에서 “조선산업을 고용위기업종으로 지정해 일자리를 보호해줘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그들이 ‘보호’해야 한다는 일자리가 어떤 건가.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데도 성과급 250%를 지급해달라는 현대중공업 노조, 4조원이 넘는 세금으로 연명(延命) 지원금을 받고도 900만원씩의 성과급을 받아낸 대우조선해양 노조의 일자리다.

쌓이는 적자로 위기의 골이 깊어지는 기업들이 고임(高賃) 기득권 노조원들의 밥그릇을 지켜주는 게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를 예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글로벌 조선시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급 과잉과 수요 감소라는 ‘죽음의 계곡’을 기업들이 버텨내지 못하고, 모두의 일자리를 잃게 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 게 뻔하다. 스웨덴과 일본의 조선회사들이 겪은 일이다. 고용 ‘보호’가 아니라 ‘파괴’가 그 결말이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정직한 정치, 정명(正名)의 정치를 외면한다면 ‘정치소비자’들이 올바른 구매를 통해 정치시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번 선거를 똑바로 결산해서,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학영 기획조정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