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건전성·발권력 남용 논란 등 문제 산적

다음 달 총선을 앞두고 여당이 공약으로 꺼낸 '한국판 양적완화(QE)'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강봉균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이 29일 한국은행에 주택담보대출증권 및 산업은행 채권 인수 등 과감한 통화정책을 주문한 데 이어 30일에는 유일호 기획재정부 장관에 대해 "금융통화분야에는 맹탕"이라고 공격하는 바람에 현재 경제정책과 금융통화정책 수장들은 수세에 몰렸다.

여당의 선거 공약인데다 선대위원장의 발언이라 직접적으로 대응하지는 않고 있지만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그리 달가운 표정이 아니다.

기재부와 한은이 협조하지 않으면 양적완화는 추진력을 얻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뒤에도 경기가 부진할 경우 양적완화를 둘러싼 논란은 더 가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양적완화 주문에 유일호, 이주열 "할말 없다", "최선 다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날 취임 2주년을 맞아 가진 기자단과 오찬간담회에 양적완화에 대한 물음에 '예상했던 질문'이라며 답변을 내놓았다.

이 총재는 "중앙은행 총재가 특정정당의 공약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면서도 "다만 한국은행도 우리 경제에 활력을 회복하도록 하고 구조조정을 뒷받침하는 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주장을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았지만 부정적 입장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은 안팎에서는 새누리당의 양적완화 주문으로 통화정책의 독립성이 자칫 흔들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적지 않다.

이번 양적완화 전에도 금리결정을 두고 이런 저런 지적이 있어 시달렸는데 강 위원장이 강펀치를 날린 셈이어서 수세에 몰린 형국이다.

강 위원장이 여당 선대위원장이라는 신분이어서 대놓고 반박이나 공격을 하기가 어려운데다 강 장관 본인이 경제정책을 이끌었던 경제전문가여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깎아내리기도 어려운 처지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대응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유 부총리는 이날 낮 경기 고양시 킨텍스 전시장에서 열린 '2016 코리아 나라장터 엑스포'에 참석 후 기자들로부터 양적완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유 부총리는 "당의 공약은 존중하지만, 통화정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짧게 답변했다.

새누리당 의원 출신으로서 여당 공약을 존중한다고 했지만 신중한 태도로 대응한 것이다.

하지만 강 위원장은 이런 반응에 대해 이날자 석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유 장관이 세제전문가여서 이 분야(금융통화)에는 맹탕"이라고 다시 반박하는 등 전혀 물러섬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기재부는 정부 여당간의 갈등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했는지 이에 대해 아무런 공식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 재정건전성 악화·발권력 남용 등 논란 가능성
유 부총리와 이 총재가 이처럼 신중한 것은 한국판 양적완화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절차적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현재 법령상 한은이 양적완화를 추진하려면 해당 채권을 정부가 보증하거나 한국은행법을 개정해야 한다.

한국은행법 제76조(정부보증채권의 직접인수)는 "한국은행은 원리금 상환에 대해 정부가 보증한 채권을 직접 인수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령을 개정하지 않은 채 한은이 주택담보대출증권이나 산업은행 채권을 인수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아 이들 채권을 정부보증채로 변경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양적완화를 실제로 추진하더라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수 있다.

우선 우리나라의 재정건전성이 나빠질 수 있다.

비교적 건전한 재정은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국제신용평가사들도 높게 평가하는 한국 경제의 '안전판'이다.

지난해 연말 기준으로 각각 90조원과 55조원에 이르는 산은 채권과 주택담보대출증권이 국가채무에 더해지면 현재 40%에 이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훌쩍 뛸 수 있다.

이렇게 쌓인 국가채무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결국 한은이 기업 구조조정을 목적으로 특정기업을 지원한다는 발권력 남용 논란이 빚어질 수 있다.

발권력을 동원했는데도 기업 부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기재부 관계자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은 아주 위기적인 상황에서만 고려해볼 수 있다"며 "국가채무가 쌓이면 전 국민이 부담을 나눠서 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은이 채권을 매입하려고 발권력을 동원한 사례는 1997∼1998년 외환위기 때 외에는 찾기 어렵다.

지금 한국 경제가 국가적 위기 상황으로 볼 정도로 나쁜지에 대해 물음표가 붙는 것이다.

양적완화 카드는 최근 정부가 경제에 긍정적 신호가 보인다며 다소 낙관론을 펴는 것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유 부총리는 29일에도 "수출이 부진했지만, 반등 기회를 잡은 것 같고 산업생산도 올라가는 것으로 안다"며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나아가 정부와 한은은 양적완화가 경제에 직접적으로 미칠 부작용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시중에 유동성 과잉공급으로 인한 물가상승부터 과도한 시장 개입으로 인한 중앙은행의 신뢰 훼손 가능성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할수 있다.

하이투자증권의 박상현 이코노미스트도 "비기축통화국인 우리나라는 양적완화가 과잉유동성, 물가압력 확대, 원화가치 급락에 따른 자본유출 확대 등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박초롱 기자 noj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