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입법 하지마라"…청와대, 각 부처에 지시
청와대가 새로운 규제 관련 법안을 억제하기 위해 행정부의 ‘청부(請負)입법’ 관행에 제동을 걸었다. 청부입법은 정부가 신속한 법안 처리를 위해 국회에 청탁해 의원입법 형태로 법안을 제출하는 관행을 말한다. 규제 관련 법안을 처리하기 위한 편법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현정택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23일 청와대에서 정부 부처 실장급(1급) 이상 고위 간부 1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정과제 세미나에서 “부처가 총리실의 규제심사 등을 피하기 위해 국회의원에게 법안 발의를 부탁하는 관행을 자제하라”고 말했다. 이날 국정과제 세미나는 박근혜 대통령 주재로 열린 만큼 현 수석의 발언에는 박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실린 것이라고 청와대 관계자들이 전했다.

현 수석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부 입법은 규제개혁위원회 심사 등을 통해 걸러지지만 의원입법은 그런 절차가 없다”며 “행정부에서 아무리 규제를 줄여도 의원입법을 통해 새로운 규제가 쏟아지면 규제개혁의 효과가 반감된다”고 발언의 취지를 설명했다.

현 수석은 이어 “의원입법도 문제지만 각 부처가 정부 입법 절차로 안 될 것 같은 규제 법안을 국회의원 이름만 빌려 발의하는 청부입법 관행이 여전하다”며 “앞으로 청부입법 관행을 전면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부처는 국무조정실이 응분의 제재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정택 수석(사진)은 “의원 발의 법안에 대해서도 규제영향 평가를 의무적으로 받도록 하는 국회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며 “박근혜 대통령 역시 규제개혁을 위해 이 법안을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청와대가 규제의 새로운 온상지로 정부의 ‘청부입법’에 주목하는 것은 정부 입법 절차와 달리 손쉽게 규제법안을 제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입법은 관계기관 협의→당정 협의→입법 예고→규제심사→법제처 심사→차관회의 및 국무회의→대통령 재가 등의 복잡한 절차를 거쳐 국회에 법안을 제출하지만 의원입법은 이 모든 절차가 생략된다.

보통 정부 부처가 법안을 내려면 6개월~1년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의원입법은 1개월 만에도 통과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신속한 입법이 필요한 경우 청부입법이 주로 활용된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은 “의원입법은 황사와 같은 존재다. 감시하는 제도가 전혀 없다”며 “규제개혁위원회 등에서 의원입법을 심사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의원들의 법안 발의 경쟁도 청부입법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많다. 19대 국회 발의 법안 중 87.1%인 1만5394건은 정부가 아니라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다. 18대 국회 때(1만1191건)보다 4203건 늘어났다. 반면 정부의 법안 발의는 점차 줄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26개월간 정부 발의 법안은 424건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후 같은 기간 884건에 비해 크게 줄었다.

정부 관계자는 “의원들이 개인 실적을 쌓기 위해 거꾸로 정부 부처에 법안을 요구하는 역(逆)청부입법도 늘고 있다”며 “법안을 졸속 심사하는 부작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정과제 세미나에서 45분여간 발언하면서 규제개혁의 필요성과 공무원의 마인드 변화를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신융복합 산업들이 우후죽순으로 나오는 상황에서 정부의 마인드가 이거 규제 안 하면 사고 나지 않을까, 규제하지 않으면 문제 생기지 않을까, 이렇게 물가에 애 갖다놓은 부모의 심정으로 이것도 막고 저것도 규제하는 마인드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민간의 역량을 믿고 공무원과 정부는 규제부가 아니라 지원부다, 이런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청부입법

정부가 법안을 직접 발의하지 않고 국회의원에게 청탁해 해당 의원 이름으로 발의하도록 하는 관행. 의원 발의 절차가 정부 발의 절차보다 간단해 법안 통과가 어려운 규제법안 등의 입법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장진모 기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