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강은구 기자egkang@hankyung.com
박근혜 대통령은 2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강은구 기자egkang@hankyung.com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이유를 밝히면서 정치권에 그동안 쌓인 불만을 쏟아냈다.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한 개정안을 “여야의 주고받기”라며 일종의 ‘야합’이라고 규정했고, 민생법안 처리를 지연시키는 국회를 향해 “국민 세금만 축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청와대와 각을 세워온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겨냥해선 “자기의 철학에 정치를 이용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16분에 달하는 발언 중 12분을 정치권 비판에 할애했다. “비통한 심정” “난센스적인 일” “배신의 정치”라는 표현도 했다. 보통 박 대통령의 회의 발언은 참모들이 쓴 초안을 기초로 하지만 이날 원고는 박 대통령이 처음부터 직접 썼다고 한다. 한 참모는 “취임 후 지난 2년4개월간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낸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법 개정안, 사법체계 흔드는 사안”

박 대통령 "여당 원내 사령탑, 경제살리기에 어떤 협조했나"
박 대통령은 국회법 개정안은 명백하게 위헌이라고 규정했다. “사법권을 침해하고 정부의 행정을 일일이 국회가 간섭하겠다는 것으로 국가행정체계와 사법체계를 흔들 수 있는 주요한 사안”이라며 “과거 정부에서도 통과시키지 못한 개정안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공무원연금법 처리와 연계해 하룻밤 사이에 처리하는 저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뒤늦게 여야 합의로 법안을 수정하면서 ‘요구’를 ‘요청’으로 바꾼 것에 대해서도 “한 단어만 바꿨는데, 요청과 요구는 사실 국회법 등에서 같은 내용으로 혼용해서 사용되고 있다”며 위헌 소지를 해소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부분을 ‘검토해 처리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로 완화하는 것은 하지도 않았다”며 “정부를 압박하기 위해 충분한 검토 없이 서둘러 여야가 주고받기 식으로 합의했다는 방증”이라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결국 “국회법 개정안은 행정업무마저 마비시키는 것으로 국가 위기를 자초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부권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여당 원내사령탑 역할에 의문”

유 원내대표 등 새누리당 원내 지도부에 대해서도 강한 표현을 써가며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냈다. 새누리당이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부를 도와줄 수 있는 여당에서조차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의 경제살리기에 대해 국회에 어떤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정치는 국민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요 국정과제와 정책 방향에 대해 정부와 다른 노선을 펴고 있는 유 원내대표를 겨냥한 것이란 분석이다. “정치의 존재 이유를 본인들의 정치생명에 둬서는 안 된다” “개인이 살아남기 위한 정치를 거두고 국민을 위해 살고 노력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배신의 정치는 국민이 심판해야”

박 대통령은 정치개혁에 대한 의지도 밝혔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돌보는 것”이라며 “정도로 가지 않고, 오로지 선거에서만 이기겠다는 생각으로 정치를 정쟁으로만 접근하고, 국민의 삶을 볼모로 이익을 챙기려는 구태정치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정치적으로 선거 수단으로 삼아서 당선된 뒤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략적인 법안 빅딜, 난센스적인 일”

국회의 잘못된 법안처리 관행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사례를 들면서 강공을 퍼부었다. 박 대통령은 “기가 막힌 사유들로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한 법안들을 열거하는 것이 어느덧 국무회의의 주요 의제가 돼버린 현실정치가 난감할 따름”이라며 야당이 연계법안을 내세워 민생 관련 법안 처리를 막고 있는 사례를 열거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월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후 아동학대 예방을 위한 법안처리가 시급한 상황에서 여야는 아동학대 예방과 아무 관련도 없는 아시아문화중심도시조성특별법을 영유아보육법과 연계 처리하기로 합의했다”며 “정작 시급한 영유아보육법은 2월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고 연계법안만 처리했다”고 지적했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등 청년일자리 창출을 위한 법안에 대해선 “길게는 3년이 다 되도록 상임위에서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상황”이라며 “내년 총선까지도 통과시켜주지 않을 텐데, 언제까지 가짜 민생법안의 껍질을 씌워 끌고 갈 것인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국회가 꼭 필요한 법안을 당리당략으로 묶어놓고 있으면서 본인들이 추구하는 당략적인 것은 빅딜을 하고 통과시키는 난센스적인 일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렇게 통과시킨 법안들은 국민 세금만 가중시킨다”고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최근 매년 800억원 이상의 운영비를 지원하는 아시아문화전당 사업을 통과시킨 것을 사례로 들면서 “자신들이 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빅딜을 해서 통과시키면서 민생과 일자리창출 법안은 몇 회기에 걸쳐서도 통과시켜주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종태 기자 jtchung@hankyung.com